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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un 18. 2022

별생각 없이 시도해 봤다

스스로에 대한 편견 벗어 던지기 - 거창할 필요 없는 자기 계발

망각하고 별생각 없이 해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이유

최근에 작지만 내게 의미 있는 성취가 있었다.

생활 댄스 강사가 되었다. 반대표 체육 꼴찌였던 내가, 이미 생활체육/댄스강사를 하고 있는 최소 스무살은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함께 프로그램 전과정을 함께하고, 실기시험을 통과했다. 이 나이에 난생처음으로 재수라는 것도 해봤다.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던 시절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시절

내게 체육은 피하고 싶은 수업이자 골칫거리였다.

생일이 2월이어서 학교를 일찍 들어간 탓에

같은 반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통통했고

100미터 달리기만 하면 두 번째 꼴찌와 엄청난 차이를 두고 꼴찌를 했고,

심지어는 꼴찌로 들어오기 직전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곤 했다. 멀리서 발을 동동구르고 답답해 하던 엄마의 표정이 생생하다.


운경 신경이 발달한 날렵한 아빠와

중. 고등학교 때 학교 대표 배구 선수까지 했던 엄마를 두었기에

운동신경이 둔한 것은 유전적 요인도 아니었고

그냥 집안에서 나 혼자 운동신경이 둔했고, 체육을 못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눈까지 나빠지며 안경마저 쓰기 시작했고

그 덕택에 피구나 배구, 농구 등 구기종목 경기를 하면

난 늘 약자. 상대팀의 첫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공이 안경에 맞으면 어쩌지 하고
햇살 좋은 날 땅에서 움직이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공포스러운 공의 날렵한 그림자에 치를 떨곤 하였다

그래서 뛰기를 포기하고 알아서 맞고 경기에서 나오곤 하였다


늘 "미"였던 체육, 간신히 80점이 되어서 난생처음 우수한 점순인 "우"를 맞고

체육선생님이 너무 고마워서 초코우유를 사들고 교무실까지 찾아가서 고맙다고 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체력장이 있는데 몸이 선천적으로 불편하거나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합격하는데 나는 합격의 기로에서 헤매다가 간신히 합격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시간이었던가 두 시간이었던 있었던 무용시간은 늘 즐거웠다. 1학년 때는 발레도 배우고, 2학년 때는 전통 무용도 배웠다. 살색 가죽 토우 슈즈에 살색 스타킹, 남색 치마와 상의를 입고 백조의 호수 (당시 도서관과 교내식당이 주요 활동 무대였던 나 포함 우리들의 모습은 우아한 백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부, 그리고 한국 전통 무용 일부도 배웠다.
여고시절 반대학 체육대회 때 선수로는 당연히 뛸 수도 없었고, 응원단으로 응원만 했던 것
수학여행 때 반대표로 나가서 무대에서 춤을 췄던 기억만 어슴프레 하다.  


대학에 가고, 대학원 졸업하고, 취업하고, 유학 가고, 다시 직장생활을 20년 하면서 하루하루가 바빠서 나는 내가 육상과 각종 구기 종목은 물론 유산소 운동을 정말 싫어했다는 것, 운동신경이 정말 둔했고, 체육은 늘 뒤에서 1, 2등이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게 되었고, 그냥 하루하루 일했다.
내가 30살, 40살이 넘도록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 역시 잊게 되었고, 그냥 하루하루 살았다.

직장과 강의실 밖에서는 대부분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오래 고민 없이 하는 나는

블랙 금요일 홍보로 생활댄스강사 자격시험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할인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냥 별생각 없이 등록했다.

등록을 하고 나니 프로그램 시작 전에 과제가 있어서 몇 가지 주요 춤 동작을 익혀서 녹화해서 보내서 합격을 받아야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반복, 녹화, 삭제를 반복하며 결국 흡족하지는 않지만 최선인 필름을 몇 개 보냈다. 일주일 후 필름을 검토한 주최 측으로부터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꼬박 이틀 동안 아침 9시에서 저녁 6시까지 강사와 10명 남짓한 20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수업 내내 동작을 따라 하고, 한 명 씩 돌아가면서 시범을 보이면 시범자의 춤을 따라 해야 한다. 동작 정확성과 완급 조절, 유연성, 리듬과 구령 등 기분 좋지만 정확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아끼지 않은 나보다 훨씬 어린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수업을 하는 것은 의외로 기분이 전혀 안 나빴고 새로운 재미가 있었다. (운동 코치들의 코칭과 지도력이 왜 기업의 리더십에 도입이 되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후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은 약 한 시간 정도 쉬지 않고 12개 정도의 음악을 연달아 틀어놓고 안무를 하면서 구령을 붙이고 가르치는 모습을 촬영해서 보내서 통과해야 자격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통과가 안 되었고 피드백을 참고해서 스무 번도 넘게 실행, 촬영 후 그나마 조금 괜찮은 것을 골라서 보냈다.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나와 함께 수업을 들은 그 젊디 젊은 사람들은 체육/무용을 전공하거나 이미 생활스포츠 강사로 활약하고 있었기에 댄스 수업 강의 자격증을 따면서 생활댄스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코치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코치는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줬다.  


하지만 자격증이 땄다고 생활댄스 지도사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강습 학원이나 스포츠센터에서 개최하는 공개 오디션을 통과해야 한다. 배경, 나이, 학력 등은 물론 다른 사회 경력은 일체 묻지 않고

자격증이 있는지 여부와 단지 4-5분 동안의 단 한 번의 시범 강습 두 가지만 보고 당락이 결정된다. 자격증이 없어도 월등한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합격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고 한다.

자격증 얻기 전 첫 번 째 시도에서는 물론 탈락했으나 자격증 얻은 직후 두 번째 시도에서 다행히도 합격했다.

나의 흑역사를 기억하는 엄마는 이 소식을 접하고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라며 웃음을 참으셨다.

본직에 충실해야 하니 퇴근 후 평일 저녁 일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대기업, 은행, 학교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 가는 것이 활력소이다. 무엇보다도 이전에는 퇴근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서 1년 회원권을 끊어 놓고 강습소에 두세 번 가고 안 간 적이 많았는데, 지금은 내가 가르쳐야 하니 꼭 가야 한다.

신기한 것은 규칙적으로 두 달 정도 다니니, 일주일에 매일 가는 것도 아닌데 내가 강습해야 할 시간이 되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강습소를 향해 움직여 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어떻게 하지, 소질이 없어서 못할 것 같은데 어쩌지 등 생각은 말고

일단 저지르면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하게 된다는 말로만 듣던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사내 정치의 달인들의 허세기 섞인 당찬 걸음걸이의 넥타이나
마음속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장하기 위한 누구 목소리가 더 클까 경쟁하는 듯한 억지웃음 소리 따위는 없다.

그리고 운동하고 춤추는 곳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고 밝다.

다른 프로그램 강사들도 늘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표정이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 남자 강사는 그룹 웨이트 트레이닝 강사인데 알고 보니 본업은 엔지니어인데

프로그램 개발하면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 외에 전혀 다른 좀 더 창의적인 일을 해보고 싶어서
겸직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토요일마다 아침 잠을 잔다는 이웃 친구를 데리고 동료 강사 아침 수업에 갔다.

그리고 아무도 내게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 퇴근이 늦어져 못 온다는 회원/지인의 문자에 내 수업 안 들어와도 되니까 일주일에 적어도 한 두 번이라도 운동하러 오고 귀찮아도 끼니 잘 챙겨 먹으라는 문자를 정성껏 작성, 오타 검사까지 하면서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낯설기도 하다.

스스로에 대한 편견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못하는지, 어떤 실패를 했는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지 말자. 제일 좋은 것은 실패의 아픔은 까먹는 것인데, 망각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큰 투자나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깊이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노하우를 생각하며 예상치 않은 신기한 일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또한 그동안의 경력이나 전공, 학력 따위는 쳐주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경험, 그 겸손해지는 경험은 진심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신기하다.  

또 생각해보면 내 삶의 주요 전환점이 되었던 행위의 70%는
내가 별 고민 없이 그냥 뭔가를 마음 가는 대로 시도했던 때였던 것 같다.

시작할 때만 해도 15분만 되어도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45분간 12개의 노래에 맞춰 외국어로 구령도 넣고 춤을 춘다. 몸이 힘들거나, 마음이 지친 사람들도 나를 보면서 "유산소 운동을 혐오하고 체육이 꼴등이었던 저 사람도 생활댄스강사가 되었는데 내가 못할쏘냐"생각하며 힘내고 오래오래 건강한 삶의 방식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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