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지만 몸을 억지로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잠을 깨기 위해 얼음장처럼 찬 물로 세수한 뒤,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물고 창문을 열었다. 소란하지만 규칙적인 비가 땅을 뚫을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게 억울해서 땅까지 뚫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게 얼마 만에 맞이하는 데이트 하는 주말인데, 비가 내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12시에 단골 카페에서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기에, 나는 서둘러 준비를 했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어울리는 옷과 가방을 골랐다. 이번 데이트 때 들려고 산 가죽가방은 비 때문에 포기하고, 나일론으로 된 가벼운 가방을 골라 그 안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약속 장소로 서둘러 향했다. 어젯밤에 쓴 편지와 한 달 전에 고른 선물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한 단골 카페는 문이 닫혀있었다. 난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해서, 카페 앞에서 우산을 들고 비를 구경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 멀리서 그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자기도 일찍 왔으면서 “왜 이렇게 일찍 왔어?”라는 남자친구의 물음에, “그냥.”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일찍 온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오늘은 남자친구와의 1000일이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이 발걸음을 재촉했고, 이 마음을 굳이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단골 카페는 닫혀있어서, 우리는 근처의 다른 카페로 갔다. 그곳에서 난 따뜻한 차를 시켰고, 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주문을 마친 우리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자연스럽게 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비 오는 날이 싫어.” 그가 말했다. 남자친구를 빤히 쳐다보자, 다음 말을 이었다. “너무 습한 것도 싫고, 해가 없어서 기분도 안 좋아.” 난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난 비 오는 건 싫지만 이렇게 실내에서 비를 보는 건 좋아. 빗방울이 창문에 동글동글 맺혀서 붙어있는 모습도 귀엽고, 타닥타닥 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져.” 우리는 서로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누구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각자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대화가 끊길 때면 빗소리를 간식 삼아 차와 커피를 나눠마셨다.
남자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비 이야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연애 초, 비가 올 때면 이상하리만큼 남자친구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때는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어서 눈치를 보기도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난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남자친구는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는 마음에, ”요즘 걱정거리 있어?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니. 요즘 장마라 축축해서 기분이 안 좋네. 머리도, 옷도 젖는 게 싫어서.”라며 비가 싫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는 답변을 듣고도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 이유로 이 정도로 비를 싫어한다고? 왜?’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난 뒤에,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남자친구에게 “비 오는 날은 만나지 말까?”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비 오는 것에 대한 취향도 다르고,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만날 수 있었을까?’ 혼자 고민만 하는데 남자친구가 내 옆에 와서 앉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내가 하던 생각을 이야기하자, 남자친구가 말했다. “오히려 너무 달라서 만날 수 있던 거야. 난 너로 인해, 넌 나로 인해 많이 성장하고 바뀐 거니까.” 그 말에 괜히 코끝이 찡했다. “요즘 보면 내가 너 같은 행동을 하고, 넌 나 같이 행동하는 것 같긴 해.”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맞춰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괜한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나의 물음에 늘 느낌표로 답을 해주는 너니까,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만난 거구나 싶었다.
“우리 오늘 1000일이니까 특별한 거 해보자.”라고 내가 제안하니, “그럼 비 맞아볼까?”라고 말하며 웃는 그였다. 정말 괜찮겠냐는 내 물음에 그는 확신에 찬 끄덕임으로 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우산을 접고 카페를 나가 비를 맞으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행히 하늘이 아침보다는 덜 억울했는지, 비는 적게 내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비는 차갑고 축축했지만, 너와 맞닿은 나의 손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의 손이 내 손을 꼭 잡아주는 감촉이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너와 맞는 비라면, 따뜻하고 좋은 것 같다. 역시 난 비 오는 날이 제법 마음에 든다. 시간이 쌓이고, 취향이 뒤섞이는 우리의 오랜 만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