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순한맛 버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발언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때는 참으로 잔인하다. 인간세상에 법과 규칙이 정해져있긴 하지만 이것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숨이 막히는 감옥같다. 서슴없이 시퍼런 종이칼을 휘둘러대는 사람들에게 알량한 면죄부를 줘버려서 조금의 책망도 할 수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즉흥적으로 흥미가 생긴 영화는 그 평가가 어떻든 무조건 본다. 판단은 내가 해야하니까. 좋아함의 기준은 따로 없다. 좋아하는 감독이든, 유명한 감독이든, 좋아하는 배우든, 좋아하는 시나리오든 뭐 하나라도 충족하면 그만이다.
영화는 슬프고, 처량하고, 애잔하고, 유쾌하고, 번뜩였다. 처음엔 현재 6070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앞으로 다가올 일자리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가족의 변화에 대한 외로움과 씁쓸함도 많이 담은 영화였다.
만수(이병헌)는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3명을 죽인다. 그들을 죽이는 그의 과정은 당연히 생각했던것보다 순탄치 않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들은 만수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자들이어서. 그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처단 리스트(?)는 모두 만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만수와 가장 비슷한 생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진 30년을 한 업계에서 몸담았고, 그로 인해 제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력도 많이 했고, 각자 자신만의 특기를 살려서 경력과 실력도 쌓아두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처자식과 삶, 인생에서 지키고 싶은 것도 많다. 그렇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으니 초면이지만 얼마나 공감되고 반가웠을까. 그래서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하던 자기최면을 살인에 사용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사실 어찌보면 이게 재취업의 과정이니 같은 용도이기도 하다)
결국 만수는 이 3명을 죽인다. 물론 모두 초면이지만 그들은 어쩌면 만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인물들이다. 구범모(이성민)은 그가 닮고 싶은 우상. 고시조(차승원)은 비슷한 처지의 어쩌면 조금 더 못난 마음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친구. 최선출(박희순)은 요즘 잘나가는 소위 말해 끼와 센스를 겸비한 배울점 많은 동료. 그들을 죽이는 방법을 강구하고 시나리오를 짜기 위해 만수는 시간을 들여 주변을 맴돌고 관찰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죽이려고 공을 들이는 그 시간동안 만수는 그들에게서 공감대를 느끼고 동병상련을 느끼고 애잔함을 느낀다. 구범모에게는 아내와의 관계와 관련해 공감하고 그를 도우려고 하며, 고시조와는 딸과의 관계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여 묻지도 않은 본인의 이야기를 터놓기도 하고, 최선출에게는 일, 회사, 사회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침 튀겨가며 부르짖기도 한다.
사실 만수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해고될 지 모르는 때에도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회사에 한 소리를 내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자리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인간관계를 모두 죽이고, 결국은 동료들을 해고하고 기계와 일하라는 회사의 요구사항도 받아들인다. 만수는 인간관계를 버려야지만 자신의 가족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살인까지 해서 일자리를 되찾았고 모든 생활이 원상복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온전히 되찾아지지 않는다. 겉으로 봤을 때는 모두 되돌아온 것 같지만 일하러 가는 만수를 보며 가족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 퇴근하고 또 가족들에게 아빠노릇을 하려고 하는 그의 모든 제안은 가족들에게 거부당한다. 그들은 온전히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만수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일자리를 위해서 살인까지 하는 만수, 이제 그들에게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만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인데 왜그럴까? 가족들은 이런 원상복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도 아이들도 만수에게 어느정도의 불만을 표현하긴 했지만 그들은 만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불만표시를 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재촉하지도 않았고 미리는 바로 취직도 하고 모든 문화생활을 정리하는 등 가족이 함께 해결하려고 했다. 미리는 아이들을 동지들이라고 부른다. 옳지 않은 방법이긴 했지만 첫째도 보탬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만수는 자기 스스로가 만든 책임감이라는 매듭에 옥죄어서 자진해서 본인을 그런 위치에 놓았다. 결국 만수는 자신이 설정해놓은 틀에 갇혀 진짜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오로지 기계와만 일하고 있는 만수의 모습은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와 다를 바 없는 만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처단 리스트 3명을 관찰하며 동병상련을 느낀 만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계획을 철회하지 않는다. 심지어 최선출과의 대화에서는 그를 죽이지 않고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출도 여지없이 죽이고 만다. 이유는 이 전 사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실 이것은 만수의 비겁한 변명일 것이다. 만수는 그들을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럴 때가 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사실 나는 해결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굳이 무식한 방법을 택하고 싶을 때가. 그 문제 자체가 주는 중압감이 너무 강해서 그 스트레스 때문에 직접적인 해결방법이 아닌데도 아주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그런 때 말이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의 뇌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미 경험했던 익숙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의무감에 휩싸인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과도한 책임감에 짓눌려 산다. 그리고 그 책임감이라는 검은 안개에 눈이 가려져 다른 길은 보지 못하게 된다. 돼지농장이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만수 아버지처럼, 재취업을 위해 타인을 죽이는 만수처럼, 음악이나 기술에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일자리를 기다리는 범모와 시조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처량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자랐다고 해서 다른 선택을 하지는 못하는걸까? 극중 범모의 말처럼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야' 라는 그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심지어 옆에서 다른 길을 조언해주거나 금전적으로 조력해주기까지 하는 아내가 있는데도 말이다. 고구마 한 트럭을 먹은 것마냥 답답할 뿐이다.
만수의 살인은 실제 우리가 재취업을 하는 과정과 아주 많이 닮아있기도 하다. 면접을 보는 만수와 후반에 살인을 모두 끝낸 후의 만수는 뭔가 달라보인다. 초반보다는 후반의 만수가 훨씬 당당하고 차분하고 여유있어 보인다. (사람을 죽였으니 다른 일들은 당연히 애송이로 보이겠지.) 그런데 나는 다른 이유를 발견했다. 바로 자신과 비슷한 생애를 걸어왔고 나이도 비슷하고 현재의 상황도 맞닿아있는 사람들과의 접전(?)을 겪으면서 만수도 성장(?)했다는 점이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는 범모를 보면서 내 아내는 불륜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마음도 갖게 되고, 신발을 팔고 있는 시조를 보면서 그렇게 고되게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는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현재 잘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스펙에 대한 열등감과 현재 일터에서의 착취, 그리고 이혼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선출을 보면서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멀고 높게만 보이던 사람들도 결국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고 같은 불안과 힘듦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그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만수는 자신을 더 잘 파악하게 되고 이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대단한 창의성(?)도 기른 것이다.
우리도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쟁자를 만난다. 그들과 대화하고 가끔은 불안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한다. 그들과 만남과 교류만으로도 우리는 많이 성장한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만이 자기 의자를 차지한다. 이런 점이 만수의 재취업 과정과 닮아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는 고상하게 웃고 아닌척 하면서 결국은 누군가를 밀어내고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죽이지만 않았을 뿐인 것이다.
의문이 풀리지 않는건 딸이다. 딸은 계속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메아리처럼 타인의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첼로연주는 물론, 자신이 첼로연주를 듣고 연습하는 것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첼로연주를 들을 때도 아무도 못 듣게 자신만의 헤드폰으로 듣는다. 자폐성향이 있는 아이는 그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외롭게 두고 곁의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후반부에 다른사람의 말이 아닌 자신의 말을 한다. 그리고 첼로연주를 한다. 이어폰이나 헤드폰도 끼고 있지 않다. 게다가 미리(손예진)가 방문을 열고 연주를 보는데도 잠깐 확인만 하고 다시 연주를 이어간다.
그런데 이런 딸과 만수의 상황이 오버랩된다. 딸 아이는 처음으로 첼로연주를 세상에 내놓고, 만수는 처음으로 이어폰을 끼고 자신만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기성세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고 귀를 닫고 개인화에 갇히게 되면 신세대는 방문을 열고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온다는 뜻인걸까...? 이 부분은 아직 해결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