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파과

배우 연기와 인물묘사는 더없이 멋졌다

by 어떤이

342p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에 순식간에 몰입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인 파과. 홀린 것처럼 페이지를 넘겨서 이틀 만에 다 봤던 작품이었다. 이미 영화가 만들어진 것을 알고 독서를 시작해서 이혜영 배우님을 상상하면서 보니 더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면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영화는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개개인의 기대감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에 항상 아쉬움이 남는 듯하다.




민규동 감독님에 대해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에 더해 민규동 감독님에 대한 아쉬움이 좀 더 컸다. 내 기준 민규동 감독님은 작품마다 편차가 크게 느껴졌다. 민규동 감독님의 영화를 처음 봤던 것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였다. 주지훈, 유아인 배우를 모두 좋아해서 정말 보물 같은 영화였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았다. 무언가 뮤지컬과 광고가 뒤섞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강했기 때문이다.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예쁘게 찍히면 상관없는데 인물들의 서사가 계속 뚝뚝 끊겼다. 인물의 배경, 성격이 소개되고 사건이 생기고 이에 대처하는 등 하나하나 새로운 내용이 머릿속에 쌓이면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모두 중구난방이어서 인물에 공감도 안되고 내용에도 몰입이 안된달까.


그런데 '내 아내의 모든 것'은 또 달랐다. 남편 두현과 아내 정인의 기분과 상황이 모두 빠르게 이해되었다. 특히 정인은 변덕스럽고 회의적이지만 사랑스러움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인물이었는데 그녀의 기분이 바뀌는 속도를 꽤 따라갈 수 있었고 이해도 되었다. 그리고 두현의 아내에게서 벗어나고도 싶고 함께 있고 싶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이해시킬 정도면 연출과 서사 소개가 잘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파과는 지금까지의 민규동 감독님 영화 중 가장 아쉬웠다. 광고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영상미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면서 주인공들에게 순식간에 몰입되어 그들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통 스릴러처럼 그들의 행동을 숨죽이고 따라가면서 궁금증 때문에 안달 나는 재미도 없었다. 말 그대로 어느 하나 장점이 딱히 없는 밋밋한 영화였다. 이렇게 매력적인 원작으로 말이다! 개탄스럽다.... 흑흑




원작의 마니악함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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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마니악한 느낌을 살려 미장센을 더 신경 쓰는 편이 어울렸을 것 같다. 이 책은 주인공의 일대기를 흐름에 따라 그리지 않는다. 마치 영화처럼 인물의 기억에 따라 파편을 하나씩 꺼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파편들을 작가의 매혹적인 문체로 굉장히 신비롭게 그려내어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 또한 이런 원작의 퇴폐적이고 애잔한 분위기를 미장센으로 살리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잘 살려지지 않은 것 같다.


영화 달콤한 인생이 누아르가 아니라 고독과 사랑, 연민 등의 다양한 감정이 섞인 비극적인 철학영화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도 연출 덕분일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조폭이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아름다운 첼로 선율을 들으며 형용할 수 없이 흔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너무도 잘 느껴지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수양나무(맞나)를 보여주며 공자의 한 문장 같은 내레이션을 넣은 것도 한몫하고. 하지만 영화 파과의 액션신은 눈물 나는 아름다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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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혐관이나 애증같은...


예를 들면, 투우의 미치도록 조각을 죽이고 싶지만 미치도록 살리고 싶은 그런 이중적인 마음을 칼을 쥔 손이 망설이는 모습을 찰나의 순간으로 보여준다거나 하는 그런 가슴 저린 연출 말이다. 박찬욱 감독님처럼 미장센을 많이 넣거나 변성현 감독님처럼 덕후몰이할만한 웹소설과 같은 지독한 관계성, 애증, 혐관 등의 느낌을 잘 살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


심지어 이혜영 배우님은 관객들에게 '사회적으로 뭔가 고립되거나 삶의 깊은 영혼의 울림을 아는 특별한 분' 같다고 말하며 모든 오타쿠들을 긁히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런 명확한 팬층의 니즈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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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묘사는 완벽


그래도 인물 묘사는 좋았다. 이혜영 배우님은 그냥 존재만으로도 '조각' 그 잡채라서 크게 묘사에 대해 기대가 없었는데 약간 미스터리 하고 만화적인 캐릭터인 '류'는 약간 눈을 덮는 앞머리에 아주 마른 몸, 검은색 니트를 입은 김무열 배우님이 거의 200% 구현한 것 같다. 선악이 공존하는 김무열 배우님 특유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고 특히 눈을 덮는 긴 앞머리가 일본 스럽고 만화적인 캐릭터에 가장 큰 몫을 했다. 데스노트 엘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뤄서 단단한 성인이 된 모습 같달까. 근데 또 오글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의 나카도 케이 같은 분위기도 보였다. (과묵한 괴짜 같은) 여하튼 간에 그 소설 주인공과 같은 비현실적인 아우라를 제대로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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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을 것 같은 각색


강 선생이 페이닥터가 아니라 수의사로 바뀐 것은 오히려 매력요소가 반감되었다. 강 선생이라는 인물은 의문스럽게 느껴지다가 무한정 믿게 되어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의사로 바뀌면서 그런 점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연우진 배우라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매력을 잘 살렸을 텐데 좋은 포인트를 놓쳤다는 게 아쉽다.


선택과 집중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책에서 나왔던 모든 설정을 다 넣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투우와 조각의 마지막 해피랜드 신에서도 투우가 섭외한 업체대표와의 옥신각신하는 장면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소모되었다. 제대로 살리지 않을 것이라면 그냥 빼버리거나 조커가 동료를 죽이는 것처럼 소모품처럼 대하는 모습만 아주 짧게 보여주는 정도로 가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괜히 길지도 않은 영화가 늘어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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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의 아쉬움


다른 분 후기에서도 봤는데 사운드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 이해가 어렵다. 특히 김성철 배우는 딕션은 좋지만 비음이 좀 섞인 목소리라서 그런지 안 좋은 사운드랑 얽혀서 웅얼거리는 느낌이 강하다.(연기는 정말 좋았다) 특히 책에서도 가장 절정이었던 조각과 투우의 마지막 결투에서 그 아쉬움이 가장 컸다. 죽어갈 때여서 안 그래도 잘 안 들리는데 사운드 문제로 아예 옹알이처럼 들린다. 이건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영화관에서 보고 집에서도 다시 봤을 때도 느꼈던 점이다. 정말 귀가 찢어질 정도로 음량을 높이지 않는 이상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는 답답함이 크다.


파과는 몇 번이나 돌려보고 음량을 벼락처럼 크게 한 뒤에야 대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혹시 대사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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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왔네. 이번엔 내가 이긴 거야. 당신 두고 먼저 가는거니까. 왜 잘해줬어? 알아보지도 못할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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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무서우니까. 기억 못하면 어떡해"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을 규격화된 틀에 가둬버린 답답함


이 대사를 정확히 듣고 나니 그제야 눈물이 났다. 원작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해피랜드 설정이 있어서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원작을 볼 때에도 투우에 감정이입을 많이 했다. 본인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캐릭터로 나오기도 했고 그의 감정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나는 복잡한 캐릭터에 마음가는 사람이니까.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질투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그냥 한 사람에 대한 '거슬림'. 그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가장 지독한 집착을 이끌어낸다. 나도 상대도 의도하지 않은 우연으로 형성된 인연. 그런데 서로에게 비정한 파멸만을 안겨준 나락과 같은 연. 그런 인연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실제 관계 또한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더욱 미련이 남고 끈질겨지는 것 같다. 투우의 감정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런 그의 매력을 그저 엄마가 없는 학대아동의 그리움으로 선고를 내려버렸다. 그 순간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조각을 향한 절규들이 모두 불쌍한 어린 아이의 투정으로 단순하게 정의되어버렸다. 그리고 호기심은 사라졌다. 엄마 없는 어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정도로만 느껴졌다.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필체를 그대로 가져오기에 무리가 있었다면 좀 더 명확한 설정은 하되, 표현 방식을 더 추상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혜영, 김성철 배우님의 열연으로 애증서사의 끝을 영상으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두 분 다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비주얼은 200% 착붙이었다. 슬프지만 10년 정도 뒤에 다시 영화화되었으면 좋겠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정말 몽환적이고 고독한 영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