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이다

나의 혈통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by 어떤이


들어가며

사람은 인생에서 굵직한 결정을 한다. '수녀'가 되겠다는 결정은 그런 것들과는 비하지도 못할 정도의 큰 결정이다. 인간으로서 누리는 모든 욕심과 쾌락,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일. 오로지 한 분에게 나라는 존재를 그대로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다.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그 결정을 어린 나이에 해야한다는 것.


그러니까 아직 세상을 다 경험하지 못했을 때 말이다. 대체로 비구니가 되는 분들은 본인만의 인생을 살아본 후, 특정 계기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 것과 조금은 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선택했다. 그런 거대한 선택을 하는 기로에서 나의 혈통에 대해 새로이 알게되었다는 설정에 매료되었다. 고민하는 분야가 어떤 종류인지,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영화는 내게 궁금증 '해결'이 아닌 '성찰'을 주었다. 나 이외의 다른 세상에 무지했던 내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성찰을 하게 했다.




안나에 대하여

common (1).jpg @네이버영화


안나는 그저 자신이 잘하는 조각을 하며 수녀로 살았다. 그녀의 얼굴은 20대 중반 정도 나이로 보인다. 말이 없고 조용하며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으로 보인다. 서원식을 앞두고 수녀님은 안나에게 이모를 만나보라는 제안을 한다. 이 때 안나가 묻는다.


'꼭 그래야만 하나요?'


보육원에 맡겨진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 듣는 혈육인데 안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이미 수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가족은 필요하지 않아보인다. 그리고 완다를 만난 후, 안나는 완전히 다른 자신을 만난다. 완다는 '너 귀엽다'고 말한다. 그녀의 외모가 꽤나 예쁘고 귀여워서 그저 무감각하게 신앙의 의무를 다하면서 살기에는 아까운 듯 말한다. 안나는 그런 이모와 함께 이야기하며 자신을 알아간다. 그리고 색소폰을 부는 한 청년에게 호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입고 싶은 옷도 생긴다. 그녀에게 활기라는 것이 생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 성격, 욕망을 모두 알게 된 안나는 다시 수녀의 길로 들어간다. 자신의 출생, DNA, 가족, 아픈 역사.. 그 모든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때의 그녀의 삶이 더 명확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무감각의 세계로 향한다. 그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삶으로. 안나의 선택은 어쩌면 완다의 죽음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의 우리를 대변하는지도

common (2).jpg @네이버영화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누구나 다 아는 불합리가 반복되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이 사는 100년 동안 무한 반복으로 지켜본다. 내가 피부로 체감하기 전 어릴 때부터도 먼저 삶을 경험한 선배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어 알게 된다. 언젠가 몇 번은 분개하고 변화하고자 의지를 보인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중 다수는 그저 나의 현재의 삶을 반복적으로 살기로 결정한다. 행여나 그것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 하나로 뭔가가 바뀌겠어? 지금까지 안바뀌었다면 앞으로도 안 바뀔 가능성이 커'라는 판단히 기저에 깔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다수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더 효율적인 길일까?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것은 '생각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워딩은 '생각보다'이다. 사실 30대까지는 더 나이를 먹으면 '정답'을 찾거나 알게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를 위해 많은 것을 겪어보고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든 이후에 직면하는 것은 '무'. 결과적으로 정답이란 없고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곧 정답이다. 혹시나 그것이 틀렸다고 할지라도 그건 일시적인 것이다.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 판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정답 찾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이다.'


이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았어도 다시 '허무'로 돌아갔지만 그녀에게는 이모와 만난 추억이 있고, 부모님과의 교류가 있다. 이모를 잃었지만 이다에게는 이모를 얻은 것과 다름 없다. 이모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그녀를 잃었지만 이다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완다가 살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그 결과가 파멸일지라도 일단 겪어보고 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마인드를 장착한다.



완다는 왜 갑자기 이다를 만나고 싶어했을까

common.jpg @네이버영화


아들을 맡긴 완다. 그녀는 정을 주지도 못했던 자신의 아이를 여동생에게 맡겼다. 그 아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웃음을 짓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등 사소한 모든 것을 완다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아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슬픔을 고스란히 안고도 스탈린 정권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독재정권의 가장 전방에서 잔인한 판결을 내리며 수많은 이들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것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단죄가 될 수 없으며 나는 또 다른 가해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물밀듯이 그녀를 덮친다. 그 시점에 그녀가 안나를 찾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잊으려 노력했던 그 아픈 과거와 관련되어 있지만 조금도 발을 담그지 않은 고귀한 존재, 그 존재를 직접 만나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이 가장 깊게 잠식되는 것은 '슬픔'인 것 같다

common (5).jpg @네이버영화


그렇게 이다와 과거를 다시 마주한 완다. 이미 알고 있던 진실에서 가장 고통스러워 마주하고 있지 않던 조각을 이다와 함께 맞춘다. 그리고 완다는 세상을 등진다. 슬픔을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고 분노로 표출하며 악독하고 방탕하게 살더라도 '살아있는 것'이 나은 것일까. 아니면 그 슬픔을 그대로 마주하여 더 이상 현실세계에서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리고 '죽어버리는 것'이 나은 것일까. 완다의 죽음은 갑작스러웠지만 이해됐다. 그녀는 이다와 의지해서 살아갈 수도 없다.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도 수녀원으로 '도망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마주해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이 가장 이겨낼 수 없는 것은 '슬픔'이다.


이다를 만나 기뻐하면 동생의 사진을 보던 완다의 모습을 다시 보니 마음이 아프다. 그 어린 날의 슬픔과 외로움을 안고 있던 그녀, 그리고 이후 직업 특성상 시대의 대변자로서 악한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던 그녀,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을 개인적인 죄책감으로 돌려 버거운 회한에 숨막혀버린 그녀. 시대에 따라 휩쓸리며 살아왔을 뿐인데 결국은 슬픔, 고통, 회한 그 모든 것들에 잠식되어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이 정말 아프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삶은 마치 한국의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폐쇄된 자들이 내리는 끔찍한 결정

common (3).jpg @네이버영화


나의 이웃을 죽이는 일이 어떤 것일까. 만약 시골에 사는 엄마가 없었다면 이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시골사람들은 굉장히 폐쇄적이기 때문에 법보다 위에 있는 그들만의 카르텔이 있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무지막지함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그 동네에 있는 사람들 다수가 모두 동의했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내려버리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만다. 영화 '이끼'나 '김복남살인사건의전말' 드라마 '괴물'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섬뜩한 면모다.


예드바브네 사건 또한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시작된 계기가 있고 어쩌다보니 마을 사람 모두가 휩쓸리게 되어 이 결정이 분명 옳을 것이라는 성급한 확신을 내려버린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쉽게 결정을 내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고립된 작은 마을에 살고 있고 그들을 감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어떤 누구도 그들을 죽이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여긴 내 땅이고 내 집이야


완다와 이다가 찾아가서 그들의 부모의 이름을 대자마자 집주인이 대뜸 건넨 말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마치 자신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나의 결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게 내 가족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살 수 있었다. 인간은 얼마나 잔혹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