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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아 Jan 09. 2019

나비효과

feat. 서른 살 유학 그 이유에 대하여

작가: Charlotte Salomon

서른 살 9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왔다. 부모님께선 다 큰 딸을 걱정을 하셨고, 친구들은 나의 자유를 부러워했다. 반응은 다들 달랐지만 공통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 곳 파리. 영화 공부를 하러 한국에서 왔다고 했을 때, 이 곳 사람들은 역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래서 왜 프랑스야?

매번 같은 질문이지만, 명확하게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면 사람들은 잠시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뜨거운 열정도 없이, 서른 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로 떠나온 것은 사실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어쩌면 나비효과 때문이다.




난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우리 집안 종교는 꽤 다양한데, 친가 할머니는 불교신자이셨고, 친가 쪽은 유교사상이 심했다. 심지어 어렸을 적, 제사나 명절 때 여자들과 남자들이 밥을 따로 먹곤 했다. 외가 쪽은 무교인데, 증조할머니께서는 여호와를 절실하게 믿으셨다. 엄마는 결혼 이후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고,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천주교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지금 엄마는 스스로 불교신자라고 말하신다. 나는 엄마가 절을 가는 걸 보지 못했는데, 3년 전 동생이 국가고시를 볼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교인 아빠랑 같이 절을 찾으셨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부처님에게 절을 했다. 필요할 때만 기도를 하는데 무슨 기도발이 있겠나 싶었는데, 동생은 다행히 시험에 합격했다.

어린 시절 나는 이처럼 집안의 가볍고 다양한 종교적 영향으로, 천주교 유치원을 다녔지만 지구와 가족의 평화를 위해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 제우스,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관광지로 성당을 갈 뿐이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모든 게 공허해졌는데, 가끔 핵전쟁이나 유성 충돌이 일어난다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등바등 살기보단, 그냥 깔끔하게 죽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 제2외국어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친구랑 같은 반이 되고 싶어 가장 인기 없던 독일어를 선택했다. 우리는 같은 반이 됐지만, 독일어 선생님이 갑자기 전근을 가셔서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 반은 프랑스 어반이 되었다. 그때 내 프랑스어 성적은 ‘가’였고, 프랑스어 선생님은 나를 포기했었다.


꽤나 게으르고 나태한 성격이었는데, 중학교 시절에 캣츠 뮤지컬을 보고 뮤지컬 연출가가 되고 싶었다. 사실 춤과 노래를 하는 배우들도 멋있어 보였지만, 어렸을 적 트라우마 때문인지 배우가 되고 싶진 않았다.

7살, 천주교 유치원을 다니던 때, 우리 반은 학예회로 백설공주 연극을 했다.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 역할을 고를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때 난 손을 잘못 들어 거울 역할이 되었다. 가장 창피했던 것은 무대에 올랐을 때이다. 다른 아이들은 귀엽고 이쁜 코스튬을 입었었다. 그런데 나 혼자 보라색 쫄쫄이 옷을 입고 거울로 분장을 한 것이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정말 싫어졌다. 이런 이유에선지, 눈에 보이는 배우들보다 뒤에서 극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원하는 과에 진학을 위해 실기학원을 등록했다. 그런데, 등록을 잘못해서 연극 연출이 아닌, 영화 연출 수업을 등록하게 됐다. 하지만 그 수업도 듣다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수업을 바꾸는 게 귀찮아서 영화 연출 수업을 계속 듣게 됐고,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영화 공부를 하고 있는 첫 번째 계기이다.


그 후, 미국으로 편입을 하고 싶어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고, 영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편입에는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복학을 했는데, 이때, 시나리오 수업을 들었다. 그 당시 교수는 파리에서 영화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때 당신의 유학생활 이야기를 간간히 들려주곤 했다. 그 이야기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어를 취미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만해도, 프랑스에서 영화 공부를 할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영화제와 영화 프로젝트 마켓에서 일을 했고, 이를 계기로 국제회의를 기획하는 일을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일은 넘쳐났고, 새벽까지 야근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극으로 치달았고,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자 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2017년 9월 13일 퇴사를 했고, 18일 이곳 파리에 도착했다.

특별한 계기와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 속 실수와 후회로 점철된 내 선택의 연속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고, 이것은 나비효과 같다. 앞으로 어디로 갈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앞으로도 난 의도치 않은 우연과 작은 선택의 연속으로 살아갈 것이고, 계속 방황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방황의 연속에 관련한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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