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가끔 한국인 아닌 척 함
파리 온 지 7개월 만에 한국에서 모아 온 돈이 뚝 떨어졌다. 사실 알뜰히 쓰면 일 년은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타지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돈을 쓰게 되는 경우가 생겨 어쩔 수 없이 3개월 정도 부모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대학을 마치고 학사 졸업증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처음 계획과는 달리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뭘 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는 마음도 컸다. 이런 이유로 석사에 지원했고, 운이 좋게도 학교에 들어갔는데, 서른 한살이 넘어서 언제까지 부모님에게 손을 빌리기엔 염치가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바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는데, 여름에 학교 동생이 자기가 일하는 몽마르트에 있는 갤러리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바로 그 갤러리 사장님에게 연락을 했다. 며칠 뒤, 면접을 보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일을 하게 된 몽마르트 갤러리는 무명 화가들의 그림들과 몇 가지의 예술 오브제, 그리고 피카소, 달리, 고흐, 클림트 같은 화가들의 명화들을 인쇄한 엽서와 포스터를 파는 곳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이곳에 파는 물건들을 관리를 하며, 계산을 해주면 된다. 손님이 없을 때는 내가 원하는 책을 읽어도 되고, 글을 써도 된다. 가끔 길을 물어보는 관광객들에게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때때로는 모르는 곳이어도 검색을 해서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하고, 때때로는 "Je ne sais pas", "나 몰라" 라며 시니컬한 파리지앙이라도 된 듯 툭하고 말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관광지다 보니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관광객들도 가게에 들어오는데, 이때 나는 친절하게 한국어로 그들을 대할 만도 한데 가끔 한국인이 아닌 척 불어나 영어를 사용한다. 한 번은 내 뒤에서 "한국인 같은데..?"라며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 먼산을 바라본 적도 있다.
내가 한국인이 아닌 척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만약 내가 일하는 곳이 한국 식당이나 한국과 관련된 어떤 가게였다면, 종업원이 한국어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은 크게 신기해하지 않을 텐데, 엉뚱하게 몽마르트 기념품샵에 멍 때리고 있는 아시안 여자가 한국어를 하면 사람들은 그게 신기한지 "어머, 한국말하시네요!", "어머, 한국인이시네요!" 하며 반가워한다. 사실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간혹 그와 함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여기 운영하시는 거예요?", "여기 아르바이트하세요?", "학생이세요?", "파리는 언제 오셨어요?", "무슨 공부하세요?" 라며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데, 그런 질문이 느닷없이 들어오 때면, 나는 갑자기 명절날 친척분들이 "너 요즘 뭐하냐" 라며 그다지 관심 없는데, 그냥 물어보는 뻔한 질문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곤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는 한국인이라는 반가움과 함께, 한국에서 느끼던 나이로 인한 사회적 책임의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무 살엔 대학을 하고, 이십 대 중반엔 취직을 하고, 삼십 대엔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보편적으로 우리가 상대방의 나이를 알고 나면 궁금해하는 것들.
사실 이곳에 더 있기로 결심한 이유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보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난 아직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던 것도 있었다.
물론,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 넌 너대로 멋져." 라며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아 그래 맞아! 내가 하고 싶은 거 다하면 후회는 없겠지. 이게 인생이지!" 라며 잠깐 위로가 되지만 사실 그게 오래가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난 그렇게 강한 멘탈의 소유자는 아니다.
나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하하하하, 아 뭐 그냥 그렇죠!" 라고 얼버무리며, 마치 자기 마음대로 대충 살아가는 철없는 딸 역할을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이다.
사회적 보편적 의무에서 도망친 나에게 낯선 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갑작스러운 질문들은 잠시 망각하던 현실을 내 앞에 꺼내오고, 내 머릿속을 차갑게 만든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라고 자문을 하며, 결국 답을 얻지 못한 채 "아 모르겠다..." 하며 고개를 몇 번 저어대고선, 다시 그 부담감으로부터 도망간다.
내 선택에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같은 질문을 매일매일 되묻는다.
이게 진짜로 너가 원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