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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24. 2021

강이, 걸음이, 밤이 선생이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이 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산문집인데 나는 이 책을 손에 넣어 읽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 홀딱 반해버렸다. 이 여섯 글자 제목에서 밤이 내어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밤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밤과 낮은 다르다. 낮은 공기를 가득 채운 빛과 소음,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재잘재잘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소란하던 것들이 잦아들며 각자의 휴식을 찾아 나선 밤은 온전히 내 것이다. 어둠이 내린 밤은 서늘하고 고요하지만 정신은 바빠진다. 정신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밤과 육체적으로 자극이 되는 걸음이 만나면 떠다니던 생각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며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완성된다. 그렇게 마련된 무대 안에선 어떠한 방해도 없이, 자유롭고 무한한 사고가 가능하다. 

걸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억지로 짜낸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잠자고 있던 생각들이 시원한 공기와 경쾌한 발걸음을 만나 깨어나고 막연하게만 머릿속을 맴돌던 계획이나 생각이 뚜렷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게 곧 선생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힘을 주는 이. 그래서 밤이 선생이다. 


종종 한 시간 반 정도 땀이 줄줄 흐를 때까지 걷는 강도 높은 산책을 즐긴다. 뜨거운 해를 피해 해가 지고 난 후 선선해진 한강을 따라 동호대교에서 잠수교까지 왕복 약 6km를 걷는다. 밤의 한강은 참 아름답다. 멈출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때문에 배신감과 질투에 서울에서 마음이 많이 떠나고 있는 요즘, 그럼에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건 한강이다. 하필 그 한강변을 점령하고 있는 것 또한 초고가 집들이지만. 


"한강변에 아파트만 들어선 천박한 도시 만들면 안돼"

한 정치인의 말이다. 이 발언은 즉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정치인을 지지하진 않지만 이 발언엔 공감했다. 런던의 템즈 강과 파리의 센 강만 봐도 강을 따라 극장, 박물관, 대학교, 갤러리와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적들이 줄지어 자리한다. 강을 따라 걸으며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 역사를 배우고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 J와 런던을 방문했다. 그래도 영국에 살았던 경험자로서 템즈강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 J를 데리고 외출했다. 근처에 뭐가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일단 런던 브릿지에서 내렸다. 브릿지에서 내리면 어쨌든 강은 나올 테니까. 구글맵을 펴고 주변을 살펴 보다가 익히 들어온 버로우 마켓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먼저 마켓을 둘러봤다. 역시 명성대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활기찬 곳이었다. 다음 행선지를 찾으려고 맵을 한 번 더 켰는데 '셰익스피어라'는 글자가 떡하니 보였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J에게는 비밀로 하고 템즈 강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짜잔!’하며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을 선보였다. 영문과 학도인 우리 둘은 신이 나서 흥분된 상태로 로비를 둘러보다가 마음이 동해 맥베스를 보려 했지만 벌써 매진되어 보지 못했다(아직도 한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와 조금 더 걷다보니 대체 이게 또 웬 떡인지 테이트 모던이 보인다. 테이트 모던엔 여러 번 가봤지만 런던 브릿지에서부터 이렇게 연결되는지는 전혀 몰랐다. 어차피 입장료도 무료이니 윈도우 쇼핑하듯 들어가 디에고 리베라와 칸딘스키, 피카소의 작품을 감상하고 꿈과 예술로 가득 차 일렁이는 마음을 안고 어둑해진 강가로 나왔다. 슬슬 다리가 무거워질 때다. 조금만 참고 걸어 올라가면 레스토랑과 카페, 가게가 즐비한 사우스 뱅크가 나온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어 거리는 꼬마전구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거리에 펼쳐진 중고책 플리마켓을 발견하고 우리는 너무 기뻐 발을 동동 굴렀다. 두 시간 정도 매대를 샅샅이 뒤져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은 책을 몇 권씩 손에 넣었다. 바로 옆에서는 크리스마스 페어가 열리고 있었다. 밖에는 회전목마가 경쾌한 음악 소리에 맞춰 돌아가고 있고 페어 안은 알록달록한 조명과 갖가지 조형물, 세계 곳곳에서 온 음식이 풍기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로 가득했다. 동화 속 세계 그 자체였다. 지금도 꿈만 같다. 이 모든 게 다 산책 한번 나갔다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센 강 주변을 걷다가 다리에 쥐가 났을 때도 비슷하다.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 튈르리 가든, 오르세, 앵발리드, 에펠탑까지, 두 다리만 튼튼하고 자세한 관람은 포기한다면 모두 반나절 안에 갈 수 있다. 나는 약속 장소였던 에펠탑까지 이 모든 곳을 구석구석 살핀 후 쥐난 다리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 생고생 후 눈앞에 나타난 에펠탑은 초현실적이었다. 


서울에 있는 한강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강을 따라 걸으며 살 떨리는 아파트 시세를 배우고 어느 아파트가 재건축으로 몇 배가 뛸 런지 예측해볼 수 있다. 한강변엔 자리만 나면 더 비싸고 더 화려하고 더 어려운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저기는 포레스트 뭐시기, 저기는 아크로 뭐시기, 이름도 멋있게 참 잘 짓는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의 산책 경로를 정하는 갈림길인 옥수 나들목에서 늘 한남동을 향하는 오른쪽 길을 택한다. 머리 위로 고고히 자리한 세련된 집을 구경하는 맛 때문이다. 그렇게 한강변 고가 아파트를 비판하면서도 보고 또 봐도 지루하지 않는 집들을 또 보러 간다. 

서울에서 한강이 내다보이는 창을 가진 집은 부의 상징이다. ‘한강뷰’라는 단어는 방송에서 수십억짜리 집을 자랑하는 연예인들 집 앞에 빠짐없이 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나라를 대표하는 강을 초고가 아파트와 빌라가 터줏대감 역할하며 방어하듯 두르고 있는 나라는 흔치 않다. 그게 우리나라만의 특색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한남동 언덕 위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조명을 보며 다양한 감정이 교차한다. 마음이 갑갑하고 무거워지다가도 고개를 살짝만 돌려 강을 바라보면 자연이 주는 위로에 숨이 트인다. 뜨겁게 달아오른 등을 식히는 강바람에 숨이 트인다. 집 구경, 강 구경을 실컷하고 돌아오는 길, 왼쪽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한다. 동호대교 아래로 쏟아지는 파란 불빛이 어두운 강물에 부서지는 모습이 보인다. 자연 아래 인간은 평등하다.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 안에 잠시 살다갈 공간일 뿐이다. 조급하던 마음과 걸음이 한 박자 느려진다. 역시 강이, 걸음이, 밤이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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