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묻는다. “드시고 가요?”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요’자는 붙였지만 앞부분의 ‘드시다’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문장이다. 일전에 치과에 갔을 때에는 간호사가 계속해서 “아파요?”라고 물어봐서 그 때도 아리송한 기분을 느꼈었다. 미용실에서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물 온도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분명 존댓말인데 존댓말이 아니다. 마치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수준과 시선을 낮춰 하는 질문 같고 TV 드라마에서 과도하게 낭만적인 남자 주인공이 전화기 너머 부드러운 목소리로 던지는 말 같다.
이들에게 극존칭을 바라기 때문에 지적하는 게 아니다. 손님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단지 요즘 요상한 존댓말이 이곳저곳에서 심심찮게 들리고 있어 원인과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이 추세가 언제까지 지속되고 어느 형태로까지 진화할지 노파심에 문제를 제기해본다.
90년대에 번역된 일본 소설을 읽다가 ‘비가 오시네’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건조한 땅을 적시는 단비를 높이는 의미에서 시적으로 표현한 거라면 참 멋있는 문장이고 번역가가 높임말을 오용한 거라면 애석하다. 일본어를 알지 못해 원문에 쓰인 문장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한 것 역시 애석하다.
우리나라 말의 특징인 높임말은 안 그래도 복잡한 한국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정확하게 사용하기가 꽤 까다로워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한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옷 너무 멋있으세요’라고 해야 맞는 것 같지만 옷을 높이고 싶지는 않다. 한참 높은 분에게 전화가 오면 ‘전화 왔어요’라고 하기엔 무례한 것 같고 ‘전화 오셨어요’는 누가 봐도 옳지 않다. 그래서 ‘전화 받으세요’라는 대안을 찾게 된다. 하지만 ‘전화 받으실 수 있으신가요?’ 같이 ㅅ의 개수가 늘어나면 머릿속에서는 다시 한번 갈등이 일어난다. 같은 존댓말임에도 강도가 다른 단계가 여럿 있기에 때와 장소에 맞춰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어려울 때가 있다.
오늘 다루는 존댓말은 그 중에서도 하위 단계에 속해 어렵거나 헷갈릴만한 요소가 없음에도 만연하게 잘못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드시고 가세요?’, ‘아프세요?’, ‘괜찮으세요?’ ‘세’ 한 글자만 추가해도 온전한 존댓말이 되는데 굳이 그 한 글자를 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이가 거의 비슷하고 혀나 성대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므로 귀찮아서는 아닐 테다. 그렇다면 같은 존댓말이지만 더 친근하다고 여겨서일까. 첫 번째 추측보다는 그럴싸하다. 말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친절함과 친근함을 동시에 잡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도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겨우 한 글자 차이이기에 같은 존댓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위터부터 시작해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올릴 수 있게 되면서부터 맞춤법은 수난시대를 맞았다. 사실 맞춤법의 학살은 저 아득한 시절부터 항상 있어왔지만 그 참혹한 실상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이다. 그 전까지 우리는 누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남의 일기장, 또는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훔쳐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일기장은 사적이기 때문에 맞춤법이 틀려도, 앞뒤가 맞지 않아도, 존댓말을 제대로 쓰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공간이다. 실제 싸이월드는 새로운 언어와 글자 체계를 창조하는데 일조한 일등 공신이다.
문제는 이 사적인 공간이 공적인 공간이 되면서부터다. 블로그는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 찾아보는 첫 번째 수단이 되었고 장황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글쓴이가 전문가 같다는 인상을 주는 데 한몫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글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 수없이 리트윗되면서 역시 신빙성 있는 글로 여겨지게 되었다.
극도의 친절을 내세운 화장품 로드샵에서부터 ‘이 제품은 품절이세요’와 같이 제품에 존칭을 쓰는 유행이 시작되었듯 블로그로부터 ‘진행 가능하세요’라는 역시나 아리송한 존댓말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그 역할을 ‘패브릭감이 좋으세요’와 같은 말투를 쓰는, 교환과 환불은 ‘불가능하신’ SNS 마켓이 대신하고 있고 그 마켓에서 물건을 사며 자란 세대가 온라인에서 할당된 글자 수 중 방대한 양을 가져가며 이 언어 체계가 자리 잡는데 기여하고 있다.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기 위해 명사에는 모두 존칭을 붙이는 존대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말은 참 변화무쌍하다. 이렇게 비틀면 그 모양대로 저렇게 비틀면 또 그 모양대로 변신한다. 그래서 우리말이 더 흥미롭고 소중하기도 하다. 말이 소중한 만큼 글도 소중하다. 말이 온전치 못하면 글도 온전치 못하고 반대로도 똑같이 작용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아프시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공공기관 정문에 ‘오늘은 휴무세요’라고 쓰인 시대가 곧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직 성에 차지 않는 추론이지만 ‘드시고 가요’가 왜 서비스업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수수께끼같은 존댓말이 언어 체계 전반에 자리 잡기 전에 미미하게나마 나의 우려를 표하고 싶었다(이미 늦은 것 같기도 하다. 점점 더 확산되는 추세다).
나에게 제대로 된 존댓말을 써달라는 꼰대의 외침이 아니다. ‘드시고 가요?’는 공손하지도, 친근하지도 않고, 옳은 말도 아니다. 나는 어린 아이도, 어르고 달래는 말투가 필요한 사람도 아니기에 ‘괜찮아요?’라고 달콤하게 물어봐주는 호의를 베풀지 않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