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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20. 2020

오타를 찾아내는 고약한 취미

글자야 미안해

지인들로부터 길에서 우연히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는데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앞만 보고 지나쳐 갔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었다. 시간과 장소를 들어보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분명 내가 맞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도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초등학생 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생 때-부터 나는 밥을 먹을 때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책이 없으면 주변에 있는 뭐라도 집어들고와 읽어야 했다. 턱은 음식을 씹느라 열심히 운동중인데 읽을거리가 없으면 눈동자는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고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이제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한 손으로 책을, 한 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일도, 책장에 라면 국물 튀기는 일도 현저히 줄어 들었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나 이미지보다 글자를 따라가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에도 눈동자가 쉴 틈 없이 굴러다니느라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간판이나 현수막에 있는 글자에서 오타를 찾아내는 게 나의 취미라면 취미이다. 맞춤법 지적하는 사람들은 성격이 고약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 얼굴은 잘 구분 못해도 글자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건 본인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니 성격이 고약하다는 누명인지 사실을 뒤집어써도 변명할 말이 없다. 직선과 곡선으로 연결된 단조로운 글자의 모양새가 입체적으로 세련되게 빚어진 얼굴의 윤곽보다 나에게는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오나보다. 


나와 비슷한 부류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변명해 줄 기사 역시 있다.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독해능력이 뛰어나다는 내용의 기사다. 연구를 근거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하며 어깨가 으쓱하기도 하다. 나에겐 사람들 얼굴을 알아보는 것보다 글을 잘 이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타를 찾아내는 고약한 취미가 안 그래도 비좁은 내 취미 목록에 비집고 들어왔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바로 옆 모퉁이에 '로즈버드'라는 카페가 있었다. 광화문이 좋아서 별 이유없이도 들르곤 했는데 갈 때마다 늘 눈에 띄었던 작고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항상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이 카페에서 어느 날 어마어마한 사실을 발견했다. 모퉁이에 있는 카페였던지라 한 면에 하나씩 간판이 두 개였는데 내가 항상 지나가며 보던 쪽은 '로즈버드'였다. 간판을 이미 여러 번 봤고 카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았기에 다른 면에 있는 간판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어느 날, 모서리를 돌면서 나도 모르게 간판에 눈이 갔는데 그 쪽에서 본 카페 이름은 '로드버즈'였다! 누구나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한 차이였다. 마치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항상 '키친타올'을 '치킨타올'이라고 하시는 것과 비슷한 차이이다. 둘 중에 무엇이 원래 의도한 이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장미꽃 봉오리'를 뜻하는 로즈버드rosebud였을 거라 추측한다.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그 간판을 보면 귀여워서 기분이 좋아졌다. 몇 년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로즈버드/로드버즈는 결국 누군가의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내려왔고 나는 교체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이제 로드버즈는 사라졌다.


이 때부터 간판을 더욱 눈여겨 보는 습관이 들었다. 그리고 이 취미 덕분에 그동안 서울 및 국내 다양한 지역에서 귀여운 오타 및 오자를 담은 사진들을 꽤 많이 찍을 수 있었다.  사진 속 기록된 글자들, 또는 그 글자를 쓴 사람을 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순수함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오점을 찾아내는 사람들에 비해 오타가 있어도 눈치채지 못하고, 생각한 그대로 의미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넓고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성격이 고약하다는 오명을 벗으려면 맞춤법에 미련을 버려야 하는데 사람 얼굴은 구분 못하면서 글자에만 유독 냉정한 잣대를 들이민다. 글자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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