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inko Oct 30. 2020

사람답게 삽시다

지하철 역에서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며 플랫폼에 서 있는데 2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여성이 60대에서 70대 정도의 남성 곁을 지나치며 "굳이 그렇게 고개까지 돌려서 쳐다봐야 해요?"라고 쏘아붙이며 지나간다. 그 아저씨/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 채 다시 선로를 바라봤다. 선행된 상황을 알지 못하므로 나도 머쓱해져서 선로만 쳐다봤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오바한다'라고 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남자가 기분 나쁘게 쳐다봤겠지'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코앞에서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들 때문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쳐다보냐며 따진 적도 있다. 지금이야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한숨 한 번 푹 쉬고 자리를 피할 뿐이지만 '대체 왜?'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남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그냥 무언가 앞에 있어서 궁금해서 한 번 본 건데 그게 이렇게 발끈할 일인가?



무엇이 그들을 오바하게 만들었나


2주 전, 친구 두 명과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밤 열두시가 거의 넘어갈 무렵이라 슬슬 일어설 준비를 하는데 옆테이블에 있던 남자 무리 중 한 명이 자신의 맥주잔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온다. 이미 만취 상태로 들어와 의자에서 넘어지고 소란을 일으킨 무리이다.

"혹시 대학생이세요?"

남자들은 나이가 족히 40대는 넘어보이는데 우리가 실제로 대학생이 아니라고 한들 자신들보다 스무살이나 어릴 대학생들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우리는 대학생이 아니고 지금 집에 가려 한다고 말하며 일어서는데 질문이 쏟아진다.

"지금 차도 끊겼을텐데 왜 굳이 지금 가셔야 해요?" "저희랑 맥주 딱 한 잔만 하고 가는 게 그렇게 힘든 거예요?"

우리를 설득하고 마치 달래는 듯한 말투와 자세가 매우 거슬렸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XX년!"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같이 말도 섞기 싫은 남자들의 술잔을 거부했다고 우리는 졸지에 XX년들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부모님께, 오빠에게,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무시해라", "참아라". 나도 누군가가 이런 일을 겪고 나에게 털어놓는다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라며 말 없이 그 자리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무시하고 참는 게 상책이라면 무시하고 참지 않아도 될 행동규정을 먼저 지킬 수 있게 만들 수는 없는 걸까.


1주 전, 차가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두 개의 차선이 합류하는 곳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 차선 차를 두 대나 먼저 보내주고 이제는 당연히 내 차례라고 생각해 액셀을 밟는데 옆 차선 봉고차가 박으면 박으라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다. 거의 부딪치기 직전까지 밀고 들어와 경적을 한 번 울렸더니 창문을 열고 눈을 부라리며 뭐라 뭐라 고함을 친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입모양은 볼 수 없었지만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와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까딱하는 모습을 보니 '감히 네(여자)가 내(남자) 길을 막아?' 하는 표정이다. 분명 그 사람의 막돼먹은 입에서도 'XX년'이라는 단어가 수십 번은 나왔을 것이다.  


어제, 날이 좋아 오후에 강아지들을 데리고 한강으로 산책을 나갔다. 달려가는 강아지를 따라가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산책하던 언니가 손짓을 하며 나를 막는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이미 강아지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는 왠 만취상태의 남자가 기둥앞에서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오줌을 싸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겐 '소변을 본다'는 말조차 과분하다. 벌건 대낮에 기분 좋게 산책을 나와 그런 꼴을 보니 너무 화가 나서 일부러 크게 "누가 여기에 오줌을 싸고 있다"고 말했는데 들은체 만체 자기 일에만 집중한다.

더 화가나는 건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공원 관리인으로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옆에 지나가길래 누가 노상방뇨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강아지들도 노상방뇨 하면 안됩니다." "그게 아니라 저기 누가 바지를 내리고 자기 성기를 다 내놓고 노상방뇨를 하고 있다구요." "아 네~ 그러면 경찰을 불러야겠네요." 그 사람은 비꼬는듯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마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깟일로 자기를 귀찮게 하느냐는 태도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우리가 또 '오바한 여자들'이 된 것이다.


불과 3주 안에 연달아 겪은 일들이니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얼마나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겪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제는 벽에 바짝 붙어있는 사람들은 모두 노상방뇨하는 사람들로 보이고 한적한 골목에 혼자 서서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혹시 변태가 아닐까 움찔하게 된다.

나는 왜 오바하는 여자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동물로 만들었나


어릴 땐 그런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마주하면 눈에 불을 켜고 맞섰다. 새벽에 일이 있어 로션만 바르고 지하철을 탄 나에게 화장품 냄새가 나니 딴 데 가서 서라는 할아버지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며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여고에 다니던 시절 정문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히히덕거리는 놈에게는 친구와 도망치며 욕을 한바가지 먹여줬다.


이제는 분노보다는 측은지심이 앞선다. 존귀한 인간으로 태어나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파고들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동물처럼 살게 했을까'하는 질문들이 먼저 떠오른다. 무엇이 그들을 이성과 절제가 본능과 충동에 패배해 아무데서나 다리를 번쩍 들고 영역표시를 하는 개와 같은, 또는 개보다 더 모자란 그런 존재가 되게 했을까.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찾아보려 곰곰히 오래 생각해볼 때마다 항상 도달하는 답은 똑같이 ‘교육'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한 개인의 기분과 삶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으로 남기는 여파, 그리고 그 영향과 여파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하는 교육.

책임은 무수히 많은 상황에서 강조되고 거론된다. 집안에서, 사회에서, 관계에서 끝없이 책임을 묻고 누군가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책임이, 누군가에게는 과한 책임이 물어진다. 그 안에서 개인은 각자 자신이 행동할 방침을 설정하며 자신만의 고집과 방식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문제는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커서 고생해', '돈 많이 모아두지 않으면 결혼 못해'와 같이 본인이 한 행동이 본인에게 돌아오는 결과에만 책임을 지는, 두루뭉술하고 주관적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네가 방을 치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치워야 해',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사람들이 불편해해'와 같이 당장 우리뿐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에 발자국을 남기는 도덕적이고 객관적인 책임은 등한시된다. 타인의 기분이, 감정이, 상황이 어떻건 간에 일단 내 욕구 먼저 해결하는 게 우선이고 내가 편한 게 우선이다. 나를 무시했으니 분풀이를 하는 게 당연하다. 화가 난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면 처벌받는다는 결과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이 평생 안고 갈 고통이 먼저 강조되어야 한다.

나는 아직도 열다섯살 때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며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자위행위를 하던 첫번째 변태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거의 20년이 된 일이다.




자연인과 사회인


루소는 교육소설 <에밀>에서 가상의 학생 '에밀'이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상적인 교육이 무엇인지 탐구했다.


청년은 자연인과 사회인을 하나로 통합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연인이 개인이라면 사회인은 사회 분의 개인(개인/사회)이다. 분자인 개인은 언제나 분모인 사회를 의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진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하며 이익들 사이의 충돌을 조절하여 공동선을 실현하는 이성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사회인이 되지 못하고 자연인에 머무르면 짐승이 되고 자연인을 배제한채 사회인에 머무르면 노예가 된다. '유리창을 깨뜨리면 춥게 자는 고통을 겪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처럼 억누르지 못한 충동에 의해 유리창을 깼으면 그 뒤에 따라오는 고통을 알아야하고 그 고통을 알기에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며 그 책임을 생각해 충동을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남성과 여성, 두 성별에 모두 적용된다.

충분히 억누를 수 있는 충동을 분출함으로 인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함으로 인해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피해를 알아야하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까지 비합리적으로 전체화되지 않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무지한 인간들도 타인이 자신을 짐승 취급하고 똥피하듯 피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존중받는 사람이 되고싶을 것이다.

아직 존중받는 사람이 되고싶은 마음이 있을 때,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있을 때 교육해야 한다. 모두가 지성과 이성을 가진 사람답게, 인간답게 산다면 나도, 내 옆의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어두워진 한강을 걷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 걸어 나온다.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잠재적 분노조절장애 환자, 풍기문란을 일삼는 범죄자, 즉 짐승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고 나도 아무 잘못이 없다.


사람다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이 찹찹해지는 맞춤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