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by 이상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작가 이상이 단편 「권태」에서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농촌의 벌판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 공포스럽도록 만연한 푸른빛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회색빛으로 실색하고 그 회색빛에 만족한 채로 있다. 이상이 머물고 있는 곳은 개도 짖지 않고 신문도 오지 않는 벽촌이다. 그 곳에서는 무수한 별들이 하늘에서 야단법석을 떨고 그 별 아래에서 잠들 수 있는 특권에도 사람들은 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별 아래에서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상태는 권태의 끝자락이다. 자연의 위대함에 심장이 울렁이지 않는다면 하찮은 일상에서 무슨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하물며 자연의 풍요로움과 자애로움은 배제되었지만 귀를 울리는 소음과 눈을 멀게 하는 네온사인과 백색광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겪는 권태는 얼마나 더 악랄할지 가늠할 수 없다.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모든 것을 일사불란하게 제공하는 도시에서 홀로 맞이하는 권태는 더 이상 신경을 자극시킬 정신적, 육체적 활동을 찾을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는 그런 상태이다.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악랄하고, 가장 더러운 놈이 하나 있어,
야단스런 몸짓도 없이 이렇다 할 고함 소리도 없이,
지구를 거뜬히 산산조각 박살 내고,
하품 한 번에 온 세상을 삼킬지니,
그놈이 바로 권태!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자신의 작품 중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고 평가한 시집 『악의 꽃』 중 「독자에게」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지구를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권태를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고 경고라도 하는 듯 보들레르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한다. 보들레르와 같이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태는 특히 더욱 강력하고 치명적인 괴물이다. 누군가로부터 맡겨진 일을 습관적으로 해결하는 게 아닌 요동치는 내면으로부터 끌어 올린 예술성으로 작품을 만들어야하는 이들에게 불쑥 찾아온 권태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게 할 만큼의 힘을 갖고 있다.
이상은 매일 찾아오는 오늘을 ‘널따란 백지 같은 것’이라고 이름붙이며 사소한 승부에 미련을 갖고 사사로운 생각을 아예 내어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한다. 무엇보다 쉬워 보이는 포기가 그렇게 쉽사리 되지 않는다. 절망과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면 그저 포기해버리고 놓아버리면 되지만 오히려 붙들고 늘어지는 것보다 쉽지 않기에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좌절이 기다리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 이상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는 없을 것’이라고 표현한 단계가 찾아온다. 권태를 망각하기 위한 일종의 정신적 장치처럼 과도한 생각을 강제로 멈춰주기라도 하는 듯 생각이 정지된다. 사색과 상상을 즐기며 넘쳐나는 자의식을 창조의 밑거름 삼는 창작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없는 상태처럼 더 괴로운 상태는 없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는 나는 분명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내 뇌는 일방적인 정지 상태에서도 끝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쉬고 있지만 뇌는 끝없이 일하고 있다. ‘하지 않음’이 더 힘든 이 상태,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모험을 감내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지는 기이한 상태다.
나는 이 대소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글의 시작에서 길고 긴 여름의 낮이 지루해 차라리 어둠이라도 왔으면하고 바라던 이상은 막상 해저같은 어둠이 찾아오자 우주와도 같은 암흑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에게 있어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은 불을 보면 뛰어들 줄 아는 불나비다. 불나비는 죽거나 화상을 입을 것도 생각하지 않고 불이 보이면 뛰어든다. 끓어오르는 열정을 상황과 기분에 따라 치사하게 조절하는 인간과 다르게 순수한 정열 그 자체다. 그에 비해 인간은 뜨거운 열기에 조금이라도 데일까 노심초사하며 무한히 펼쳐진 내일의 존재 앞에 오들오들 떠는 나약함의 극치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이상은 그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자신이 행복되다고 역설한다.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자는 행복하다. 참으로 모순적인 말이지만 권태를 자각할 줄 알기에 사색할 수 있다. 사색할 수 있기에 살아있을 수 있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는’ 벽촌의 푸른빛처럼 나는 나를 둘러싼 적막과 단조로움, 권태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소처럼 뒤엉킨 기억과 생각을 반추하며 끝없는 나태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