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태어나 한 번 이상은 들어보았을 성경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love가 아닌 charity이다. 돈이나 맛있는 음식을 향한 사랑, 또는 이성을 향한 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은 love이다. Love는 나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사랑하는 행위이지만 charity는 관용과 자선을 수반하는 상호적인 사랑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love이건 charity이건 어쨌든 세상은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노래 가사도 죄다 사랑 얘기뿐이고 드라마나 영화에도 꼭 로맨스가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게 너무도 많았던 나는 도대체 사랑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사랑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하나에 불과한 부차적인 정서였다. 그런 사랑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내 눈에 나약하고 외로운 존재들로만 비춰졌다.
그런데 내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누구보다도 이성적이며 지적인 작가들조차 너도나도 사랑을 외쳤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인 제이 개츠비를 통해 사랑을 말한다. 번쩍이는 섬광 아래 눈부신 파티를 열어 모두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부와 권력, 명예와 존경까지 갖춘 개츠비에게 한 가지 없는 것, 그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 그 사랑에 대한 가치관을 삶에서 실천한다. 톨스토이 역시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한 명, 내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로맹 가리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유태계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그는 냉철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한 평생 동안 사랑을 갈구했고 그 갈망을 본인의 작품들에서 각기 다른 성격으로 표출했다.
1975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꼬마 모모의 눈으로 혹독한 생을 순수하게 바라본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다.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불행과 행복이 누구를 쫓아오고 누구를 물리치는지를 모두 알아버린 모모가 생을 바라보는 거침없고 냉소적인 눈은 모모에게 무조건적인 연민을 품게 하기도 하지만 그 잔혹한 순수함에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열네 살 소년이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 말만 봐도 모모가 어떤 아이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빠 손에 이끌려 아기 때 로자 아줌마 손에 넘겨진 모모는 자신의 나이도, 출신도, 배경도 모른 채 그 집에 맡겨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다. 그곳에 살면서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 롤라 아줌마 등 따뜻한 이웃과의 교류로 삶의 지혜와 함께 냉혹함을 동시에 배운다. 진짜 세상을 알아가고 받아들이기에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모모는 자신만의 논리로 어른들의 세상을 파헤친다.
서류상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모모는 엄마가 보고 싶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물건을 훔쳐 한 대 얻어맞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도 나타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결국 말썽 부리기를 포기한다. 거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줄 부모가 없이 모모는 철저히 혼자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에 내면으로부터 견디다 못해 튀어나오려 하는 폭력성과도 싸워야 한다.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하는’ 사색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엄마아빠에 대해,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생에 대해 생각한다.
어린 모모에게 세상은 불공평을 모아 놓은 집합체이다.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라고 하소연하는 모모의 말은 사실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극도로 상대적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구는 갖고 있고 그 누가 갖지 못한 것을 또 다른 누군가는 갖고 있다. 하지만 거의 80억이나 되는 세계인구가 모두 똑같은 모양새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몸에서 생각하는 기능을 빼버리면 상대성을 인지할 수 없게 되어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이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생각을 빼버리면 인간이라는 정체성 역시 함께 사라지기에 이 역시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기 다른 겉모습을 뒤집어쓰고 천차만별인 환경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보물찾기하듯 하나씩 찾으며 살아갈 뿐이다.
이 소설에서 배우는 보석 같은 교훈은 인간들이 서로 맺는 관계의 힘이다. 갑자기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로자 아줌마와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잘못 태어났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모모는 모자지간보다 더 애틋한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를 아낀다. 서로만을 의지하던 시간이 점차 끝나가고 죽음을 목전에 둔 로자 아줌마가 두려움으로 신음하자 모모는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라며 아줌마를 위로한다.
죽은 사람은 무서움을 느끼지 못한다. 무서움과 두려움은 아직 내 심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내 눈이 제대로 세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무서움이 있기에 이겨낼 의지가 있고 두려움이 있기에 희망이 있을 수 있다. 모모에게 희망은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있었다. 로자 아줌마와 하밀 할아버지, 카츠 선생님은 항상 모모가 자라서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이런 작은 칭찬과 관심이 모여 모모의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순수한 charity이다.
소설은 다분히 무신론적이고 회의적이다. 세계 1, 2차 대전 전후에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 특히 유태계 작가들의 작품이 인생의 허무함을 다루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는 그들이 겪어야했던 전쟁이 남긴 파편과 잔해를 몸속에 지닌 채 살아가는 수치와 수모, 고통과 상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끝에는 희망이 있다. 모모는 억울한 삶을 의지적으로 부인하며 살기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여 더 자유롭고 행복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회의와 허무, 한이 서려있음에도 그 아픔을 딛고 매일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나는 로맹 가리가 될 수 없지만 그가 온 힘을 다해 세상 밖에 내놓은 맑디맑은 소설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모모가 겪는 산전수전에 읽는 내내 마음이 저릿하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life’을 ‘삶living’으로 만들 수 있는 열쇠를 만난다. 모모의 표현을 빌려 ‘입으로 쳐 넣어진 생’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남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된다. 모모는 사랑을 주고 받을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은 모모에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줬다.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가 당시 독자들과 그의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어서 사랑하라고 갈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이다.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