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by 생텍쥐페리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양을 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는 다른 어른들과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분명 나이를 먹은 것이리라.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게 인생의 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른’이라는 단어 안에 숨겨진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겁을 먹지 않을 사람은 없다. 어릴 땐 어른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그 어른들이 우리가 아이일 때 대신 돈을 벌어주고 밥을 차려주고 어려운 일을 뚝딱 해결해주었다. 나 자신이 그런 외견상 초인적인 어른이 된 지금도 조금이라도 곤란한 일에 맞닥뜨리면 바로 '아빠!'를 부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 나이가 되거나 상황에 의해 남들보다 먼저, 아니면 조금 늦게 어른이 되고나면 돈과 산술에 눈을 뜨고 인간 관계마저 계산적이 되어 마냥 모든 것을 순수하게 대할 수 없게 된다. 이내 새롭게 찾아온 모습에 익숙해지지만 종종 순수함을 잃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보이기도 하는 때다.
어른들을 방패막이 삼던 시절 읽었던『어린 왕자』는 분명 전형적인 동화의 색을 띤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서른이 지나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완전히 다른, 더 깊고 넓은 세계였다. 동화 속 어린 왕자는 기억에 각인된 모습보다 훨씬 더 외롭고 연약하며 울적했다. 생텍쥐페리Saint-Exupéry는 이 동화를 통해 우리에게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 되지 않는 법’같은 일종의 삶의 방식을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수식어가 잘 말해주듯 이 소설은 어른인 화자가 어린 왕자와 만나며 삶에 의해 오염된, 세속적으로 탈바꿈한 세계를 어린 시절의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
어린 왕자는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자신이 감당하기에 까다롭고 자존심이 세며 허영에 젖어있던 장미를 남겨두고 여행을 떠난다. 주변 소행성들을 방문하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이상한 어른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어른들의 이상한 세계를 경험한다. 어떤 별에는 권력에 취해 눈앞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명령을 내려야만 하는 어른이 살고 있었고 어떤 별에는 술을 마시는 부끄러운 모습을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시는 어른, 또 어떤 별에는 우주의 무한한 별의 숫자를 세고 그 별을 관리하기 위해 쉬지 않고 별을 모으는 어른이 살고 있었다. 이런 의미 없는 행동들이 어른들의 삶을 가득 채웠고 어린 왕자의 눈에 이런 모습은 기이하고 우스워 보이기만 한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지구에선 여태까지 유일한 존재인줄 알았던 자신의 장미와 똑같은 장미 수천 송이를 만난다. 다른 세상을 알기 전까진 하나뿐인 장미를 가꾸고 사랑해주며 행복을 느꼈지만 그 장미가 많고 많은 장미 중 하나에 불과한 평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어린 왕자는 잠시 슬픔에 잠긴다. 어리석은 어른들만 만났던 소행성을 거쳐 지구에서까지 알지 않아도 될 비밀을 알게 된 어린 왕자는 그간 그 장미 하나만을 위해 바친 사랑과 노력이 터무니없었음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그 모양새는 달라도 평생 지극정성으로 가꿔온 각자의 장미를 갖고 있다. 어른이 되어 그 장미가 세상에 하나뿐인 장미도 아니고 특별한 장미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좌절한다. 바깥 세상을 알지 못한 채 따뜻한 유리병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장미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유리병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소행성을 떠나는 순간, the rose가 아닌 a rose가 된다.
상심한 상태의 어린 왕자는 우연히 여우를 만나고 여우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시간을 들여 길들인 장미는 세상 단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장미를 책임져야겠다고 결심한다. 내 사랑과 시간을 머금고 있다면 대상이 무엇이건간에 그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 가치를 결정한다.
여우는 어린 왕자와 작별을 하며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려준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 봐야한다’는 것. 이미 눈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아온 우리에게 마음으로 보는 것은 소리를 눈으로 듣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해 극한의 상황에 처한 비행기 조종사인 화자가 별들의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비행기 사고로 사막에 떨어진 화자는 비행기를 수리하며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과 그가 떠나온 소행성과 장미, 그리고 그의 여행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고 잠시 잊었고 또 잃었던 순수성을 기억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까지도 모두 마셔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상태에서 화자는 극심한 갈증을 달래기 위해 샘을 찾아 사막을 헤맨다. 조종사 시절 겪었던 생텍쥐페리 본인의 경험이 녹아있는 부분이다. 거의 정신을 잃기 전 화자와 어린 왕자는 사막 속에 숨겨져 있던 우물을 발견한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단순히 목을 축여주는 샘이 아닌 메말랐던 삶에 물을 주고 빛을 비춰주는 오아시스였다. 이 우물이 선물처럼 제공한 물을 마시며 두 사람은 또 하나의 교훈을 발견한다. 살아남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만족하기 위해 매일 불안 속에 떨며 어디론가 향하고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도 결코 찾지 못하는 삶의 목표를, 한 송이 장미나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들에게 물은 음악이 되었고 별은 꽃이 되고 웃음이 되었다. 어른에게 사는 법을 알려준 아이 어린 왕자가 떠나고 원래 속해있던 곳으로 돌아온 화자는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세상을 살아간다.
어른이 된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어린 왕자는 너무 어려서 장미를 사랑할 줄 몰랐다. 어른이 되어서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기치 못한 불시착으로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되어 별 하나하나에 새겨진 이야기와 그 별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 역시 실수와 경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언젠가 당신은 동화를 다시 읽기 시작할 정도로 나이가 들 것이다.
C.S. 루이스가 남긴 보석 같은 말이다. 어린이가 동화책만 보라는 법이 없듯이 어른들이 동화책을 보지 못할 이유도 없다. 동화는 소설보다 더 환상적이고 더 단순하며 더 긍정적이다. 쓸쓸한 어른의 삶에 무엇보다 필요한 묘약이다. 동화가 닳고 닳은 우리 어른들 마음에 작용할 가능성과 힘을 보고 싶다. 아이와 같은 마음과 눈으로 사람을 대하고, 예술을 대하고, 삶을 대하게 해주리라 믿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양일 수도 있고 뱀일 수도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장미일 수도 있고 곳곳에 널린 흔해빠진 장미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수많은 별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내 눈으로만, 내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별일 수도 있다.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마음으로 찾아야만’한다는 가장 중요한 비밀 열쇠를 쥐어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별을 보지만, 별이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