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 by 사뮈엘 베케트

by jiinko

과거의 권력자들부터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까지, 많은 이들이 불로장생을 꿈꿨고 꿈꾼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 주는 매력이 무엇일까. 끝없이 펼쳐진 시간 앞에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 매력일까. 지구라는 영속적으로 퇴보하는 서식지에서 결말이 없는 삶이 과연 아름다울지 의문이다.

한계 없는 시간이라는 공간에 갇히면 그때부터 시간은 공포가 된다. 그만큼 시간이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가 없다. 인간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마지막 지점이 있기에 한정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더 다채롭게 채울 수 있는지 모른다.

끝이 있다는 것, 그 무지막지한 사실은 우리를 결말로 인도하지만 또 매일 새로운 태양이 뜰 때, 시작점에 내려놓는다.


작가들은 부정적인 소재를 비관적으로 풀어내면서 모순적이게도 그 안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한정적으로 팽창된 시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부조리극의 정수라고 평가되는 이 희곡의 고전은 우리가 부조리라 부르는 그 비위에 거슬리는 무엇을 알맞은 폄하와 유머를 섞어 생각보다 큰 고통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팽창된 시간을 살아가게 해주는 큰 힘은 어떤 일이 생길수도 있다는 기대감이다. 주로 그 기대감은 충족되지 않은 채 하루가 끝나지만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혹시 모를 기대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날들을 채워간다.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이 넘도록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어딘지 모르게 구멍이 난 것처럼 새어나가기 일쑤고 에스트라공은 배와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바닥에 떨어진 뼈다귀도 주워 먹으며 욕망을 채운다. 블라디미르는 기다림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에스트라공을 붙잡고 격려하지만 이런 블라디미르도 종종 죽음의 유혹을 받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 하나 오지도 가지도 않는군. 정말 견디기 힘들구나.

지루함에 지친 에스트라공의 말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막연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고역은 없다. 앞서 소개한 세일즈맨 윌리도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기만을 평생 기다렸고 『마담 보바리』의 엠마 보바리도 권태가 안개처럼 둘러싼 삶 가운데 안개를 뚫고 구원처럼 나타날 흰 돛단배를 기다렸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정확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는, 불특정한 그 무엇이 나타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하루보다 힘겹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올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고도는 내일은 꼭 오겠다는 말을 소년을 통해 매일 전달하지만 본인의 모습은 끝내 드러내지 않는다. 그 모호하고 신비로운 존재인 고도를 두 친구는 평생 기다려왔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자신이 왜 그 곳에 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 지친 여정을 끝내기에는 죽음만큼 간편한 것도 없다. 옆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목이라도 매볼까 하지만 혹시라도 고도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의미 없는 행동들을 이어간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기다리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거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들의 행동에 선명한 빛이 비춰지고 수십 년간 행해오던 이 행위에 부여할 의미와 이유를 찾게 된다. 의미와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이 행위가 부질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를 합리화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무지한 상태에 머무르는 편이 낫다.


흐릿해지는 시간 개념과 함께 이성도 무뎌진다. 그렇게 부르짖던 고도의 이름마저 흐려져 나중에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망각해 서로가 서로에게 상기시켜 줘야한다. 결국 실체도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 망각의 상태에 이르고 만다. 우리 역시 가끔은 고의적으로 망각의 강을 건넌다.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기억하는 것보다 손쉽고 생각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매력적일 때가 있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그 망각의 강을 헤엄치고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며 세상은 우리의 고통과 상관없이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애곡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듯이 한 쪽에서는 절규가, 한 쪽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눈물과 미소, 탄식과 환희를 먹고 인간은 하루씩 더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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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부조리는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부조리 철학의 대표자 자리를 차지한다. 카뮈는 자신의 작품 속 인물을 통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극에 내던져지는 인간과 그 삶, 또는 사회의 간극 안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그려내는데 카뮈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는 그리스신화에서 시시포스가 하데스를 속인 죄로 곧 다시 굴러 떨어질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계속해서 밀어 올려야했던 형벌과 같은 허망한 곳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솔로몬마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한 걸 보면 세상사가 정말 헛되긴 한가보다.


우리도 삶에서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 오늘 내가 한 일이 모이고 쌓여서 날 인도하는 정상은 과연 어디인지, 정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정상에 오른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 삶의 끝엔 무엇이 있는 건지. 답을 줄 수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알려고 하는 과정 역시 고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생각하는 행위 자체를 포기해버린다. 이 뛰어난 지혜자들의 말처럼 정말 우리는 헛된 무언가의 뒤를 좇으며 평생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찰나 같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설파하고 생의 불합리를 희극적으로 다룬다. 분위기는 희극이지만 실은 비극인 이 작품을 나는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싶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삶을 희생하며 기다려온 고도는 결국 오지 않고 그 기약 없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두 사람의 삶의 의미는 점점 흐려진다. 하지만 이 책임을 하루 속히 나타나지 않는 고도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무형의 대상을 기다리느라 인생을 모두 허비한다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은 없을 테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고도’가 무엇인지, 또 우리가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도가 오건 오지 않건 그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건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그렇게 될 때 기다림은 의미를 입고 삶 역시 의미를 찾는다.


고도Godot는 하나님을 뜻하는 영어 God과 그 프랑스어 단어인 Dieu를 합친 합성어라는 해석도 있고 누군가는 고도가 구원이자 자유이며, 빵이자 희망이라고도 한다. 하물며 저자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고도를 찾고 그의 존재에 대해 알려고 할 때 고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우리를 결말로 인도할 수 있다. 지상에서의 한계 없는 시간에 한계를 부여함으로 인생을 더욱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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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


부조리극이라는 수식과 함께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가 극 전체를 지배하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 긍정적인 빛을 본다. 아무리 무의미하고 헛되며 덧없는 행동이 반복된다 해도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다. 내가 아프면 누군가는 치유되고 또 다른 이가 넘어지면 나는 다시 일어난다. 내 시간이 줄어들며 다른 사람의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한들,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하루를 보낸다한들, 고도의 존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만 포기하고자 할 때 우리를 다시 제자리로 이끈다. 그 되풀이되는 연극에서 삶을 지탱하게 하는 활력과 유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사가 꼭 헛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만 가자.”
“갈 수는 없다.”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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