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by 프란츠 카프카, <꿈의 해석> by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릴 때부터 꿈은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라 학습되었다. 그 장밋빛, 황홀한 꿈이 우리를 비현실로 이끌고 교묘하게 약 올리다가 냉정하게 내칠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꿈을 좇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두려운 상황이 닥치기 전, 많은 이들은 꼭 쥐고 있던 꿈을 내려놓는다.
꿈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답할 수 있는 이상과 환상도 꿈이고 수면 중 무의식 상태로 펼쳐지는 한 편의 영화도 꿈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다른 꿈을 ‘낮에 꾸는 꿈’과 ‘밤에 꾸는 꿈’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사랑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자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라 정의한다. 나에게는 꿈이 바로 그런 존재다. 사랑을 ‘잘’ 하면 삶의 근원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듯, 꿈을 '잘' 꾸면 불행의 근원이 아닌 행복의 근원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의 꿈을 세세하게 묘사해놓은 기록과 편지를 모아 편집한 책 『꿈』은 ‘꿈들에 홀린 자들이 잠 없는 밤 벌인 투쟁'을 담고 있다. 그저 꿈을 많이 꾼 것이라고만 짐작했지만 돌이켜보면 꿈에 홀린 것이었고 투쟁을 벌인 것이었다. 밤새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내동댕이쳐지며 깨어나길 원하지만 그럼에도 꿈을 거부할 수 없고, 놓아줄 수 없기에 매일 밤 꿈에 홀린 채 하염없이 떠돌았다. 꿈에 잠을 내주었던 것이다.
5시 무렵, 최후의 잠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꿈을 꿀 뿐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꿈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꿈들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쓴다.
심한 불면증을 앓을 때가 아니라면 나는 꿈을 이상하리만치 많이 꾼다. 어젯밤에는 딸기셰이크 같은 분홍색 파도로 덮인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꿨고 그 전 날 밤엔 눈높이까지 차오른 시퍼런 파도에 겁을 먹은 내 모습을 보았다. 중요한 데드라인을 앞두고는 내내 곡을 쓰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꿈을 방문했던 온갖 영감과 이야기들이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나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있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나의 상상력이 투사된 초현실적인 꿈도 내 꿈의 단골 소재다. 바다는 지겹도록 자주 등장하지만 꿈속에서 재창조되는 바다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짙은 푸른색을 띄거나 무자비한 초록빛, 또는 90년대 미국영화에 나올 법한 따뜻한 노랑 빛을 띠기도 하며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왜 나는 바다가 나오는 꿈을 이리도 자주 꿀까. 바다를 그리워하지도, 바다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바다는 매일 밤 나를 찾아왔다. 꿈속 바다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해석을 찾아보다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만났다. 정신 분석가였던 프로이트는 환자들이 겪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려는 시도에서 꿈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이론적으로 치밀하게 분석한다.
왜 바다가 그렇게도 나를 찾아오는지는 결국 찾지 못했지만 미지의 세계였던 꿈의 속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꿈의 특성 중 하나인 꿈의 망각에 대해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꿈을 기억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부분을 보완하기 시작하면 상상에 의지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적 예술가가 된다. 그래서 이야기를 되풀이하다보면 스스로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게 된다.
낮에 꾸는 꿈과 밤에 꾸는 꿈, 모두에 적용되는 특성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점점 커진 꿈은 완벽하지 않은 부분들이 점차 보완되고 나중에는 상상을 만나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모습으로 완성된다. 시간이 지나며 허위였던 꿈은 어느새 자신에게만큼은 진실이 되기도 한다. 이 오래된, 색이 바랜 꿈이 실현되지 않고 좌절되면 완벽하게 포기되지 않은 채 마음 안에 머물다 서서히 곪아 생채기를 남기기도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좌절된 꿈의 크기만한 흉터가 있다.
완벽하게 합리적인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꿈은 비이성적인데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책에서 언급된 꿈의 또 다른 속성이다. 평범하고 무난한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고 그것이 곧 이루어야 할, 또는 이루고 있는 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속성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끝없이 연속적으로 광대한 꿈을 꾸는 사람은 이 문장을 보며 다시 한 번 내 꿈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며 부조리했는지 돌이켜 볼 기회가 된다.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내가 정말 이런 생각들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여태까지 살아왔단 말인가.
내 상상 속의 꿈은 결핍이 모두 보완되어 투사된 이미지로 영화보다 조금 더 드라마틱하고 소설보다 더 확실한 해피엔딩이었다. 이 무지막지하게 덩치가 컸던 꿈이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감과 함께 매년 그 크기를 축소했고 현실을 반영한 개선사항이 생기며 이곳저곳 꿰맨 자국들이 남았다. 지금 내 꿈의 몰골은 아마 너덜너덜한 넝마 같지 않을까.
꿈의 내용은 소망 충족이고 그 동기는 소망이다.
소망이 충족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꿈은 더욱 복잡해지고 왜곡되며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꿈을 아예 꾸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사실 차라리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 더 행복하리라는 생각이 요즘 자주 나를 엄습한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충족되지 않은 소망이 없음을 말하고 곧 현실에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꿈꾸지 않는 삶’이 주는 이런 유혹이 찾아옴과 동시에 과연 내가 꿈 없이 이 기나긴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걱정 역시 함께 밀려온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짓누르고 괴롭힐 때면 가끔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인물을 떠올린다.
성경은 몰라도 ‘꿈꾸는 요셉’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째로 태어난 요셉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던 형들과 달리 감성적이며 공상적인 소년이었다. 자신이 진정 사랑하던 여인인 라헬로부터 태어난 요셉을 야곱은 편애했고 자연히 요셉이 형들로부터는 시기와 미움을 받는 상황을 야기한다. 이런 상황에 요셉이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단에게 경의를 표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 꿈을 형들에게 고하니 형들의 시기와 화가 타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요셉을 미워하던 형들은 결국 그를 이집트로 향하고 있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린다.
천한 노예의 신분으로 입성한 이집트에서 요셉의 꿈같은 진짜 삶이 시작된다. 당시 이집트 왕 파라오의 호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 요셉은 총명함으로 그의 신임을 얻어 그의 집과 모든 소유를 감독하는 자가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용모가 준수했던 그를 호시탐탐 노리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여러 차례 뿌리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고 감히 보디발의 아내를 농락하려 한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이번에는 감옥에 갇힌다.
노예로 팔려온 데다가 이제는 감옥에까지 갇히다니, 여기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끝이 날 것 같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감옥에서 요셉은 함께 갇혀있던 파라오의 관리 두 명의 이상한 꿈을 해석해주고 그들이 석방되면 꼭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요구한다. 관리 중 한 명이었던 파라오의 잔을 담당하던 사람은 요셉이 해석한 그대로 복직하게 되는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듯 그는 요셉을 2년 동안이나 까맣게 잊어버린다. 이제 요셉의 기구한 운명이 정말 결말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반전이 있다. 꿈으로 인해 이 고행을 시작하게 된 요셉은 꿈으로 다시 회복을 맞는다.
파라오 왕이 어느 날 꿈 두 개를 꾸었는데 이집트 어디에서도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가 돼서야 그 관리는 요셉을 기억해 그 일에 대해 파라오에게 고하고 요셉을 왕 앞으로 불러들인다. 요셉은 그 두 가지 꿈을 해석함과 동시에 나라의 앞날까지 내다보며 이집트가 큰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조언한다. 파라오는 곧 요셉의 지혜를 깨닫고 그를 온 이집트의 치리자로 삼는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꿈 때문에 시기를 당해 노예로 팔려온 이 소년이 삼십 세에 이렇게 될 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하였더라." (창세기 37장 11절)
이 이야기가 완벽한 결말을 맺으려면 꿈을 꾸는 당사자도 중요하지만 그 꿈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도 반드시 필요하다. 야곱은 요셉이 나중에 큰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믿었다. 어쩌면 요셉도 자신이 언젠가는 꾼 꿈대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소년 시절부터 알고 믿어왔을 수도 있다. 요셉의 당시에는 허황되보이던 꿈을 진심으로 믿어준 사람이 최소 두 명은 되었던 셈이다.
요셉은 도저히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꿈꾸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현실은 그저 수치스럽고 불공평한 감옥일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동안 우리는 외부 환경과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꿈의 세계만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한 그 현실이야말로 진실일 수 있다.
꿈의 세계만이 현실이라고 믿어야만 그 현실이 진실이 될 수 있다.
아무리 기약 없이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의구심이 들어도 꿈꾸지 않는 삶보다 꿈꾸는 삶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그밖에 할 수 있는 다른 게 딱히 없기 때문이다. 꿈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폄하하거나 축소시킬 필요는 없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꿈이라 해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보고 안 될 것 같으면 조금 그 크기를 줄이면 된다. 불가능해보이는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있고 비현실로 남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믿는 한, 그 순간만큼은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가 1937년 그린 <잠Sleep>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우리의 꿈을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이 뒤범벅된 꿈이 지배하는 어제의 밤과 오늘의 낮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꿀 가치가 있는 꿈이 있기에 지탱될 수 있다.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없듯이 꿈꾸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은 무구한 삶을 사는 어린아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꿈꾸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