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판타지, 인간과 벌레 사이

<변신> by 프란츠 카프카

by jiinko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문장은 유대계 체코-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변신』의 첫 구절이다. 언제 어떤 경위로 처음 이 소설을 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20대부터 30대를 지나는 시간 동안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책 상위권에 머물며 두고두고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카프카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사실주의와 판타지가 혼재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당연하게 일어난다. 소설 속 인물들과 맞닥뜨리고 난 후 얼마간은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에 이미 그들과 나는 동일 인물이 되어있다. 여기에서 ‘그들’이라는 복수형을 쓰는 이유는 내가 부조리한 사회의 피해자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를 그렇게 만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회사 사장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 회사의 외판사원으로 일하던 그레고르는 잦은 여행과 불규칙한 식사로 피로에 찌들어있는 상태였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대 안에서 자신의 변한 모습을 발견한다. 납작한 몸은 옆으로 퍼져 있고 몸의 미끈한 표면 때문에 이불은 흘러내리기 직전이다. 천장을 향해 버둥대는 수많은 작은 다리들은 잔뜩 화가 난 듯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움직인다.

그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고 그 불안한 꿈이 현실에서도 이어진다. 하루의 고단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잠에서조차 그는 휴식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인지했음에도 몸 상태를 살피고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그 몸으로 출근을 해야 할지부터 생각하는 그레고르의 모습에서 잔인한 책임감이 보인다. 시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 그레고르 때문에 호들갑을 떨며 난리가 난 가족들과 출근을 하지 않은 그의 상황을 파악하러 집으로 온 지배인의 소란에 비해 어떻게 하면 다음 열차를 탈 수 있을지 시간을 계산하고 지배인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할지 궁리하는 그는 오히려 침착하기까지 하다.


몸이 허약해 일할 수 없는 부모님과 누이동생까지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던 자신이 흉측한 모습으로 방 안에 갇혀 지내게 된 후에도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워진’ 채 항상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레고르는 한순간에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타락한다.


인간은 두 다리를 써 직립보행을 한다. 해충과 벌레는 엎드린 자세로 이동한다.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처음 선보이기 위해 어떻게든 서있어야 했다. 선 채로 그들에게 나에겐 아직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아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온몸으로 보여줘야 했다. 그는 하반신의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람처럼 꼿꼿이 서 있으려 하지만 결국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그제야 그동안의 불편함이 가시고 그레고르는 몸의 균형과 평정을 느끼며 드디어 통제 불능이었던 자신의 작은 다리들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레고르에게는 너무나도 편안한 이 모습이 가족들의 눈에는 그저 무능력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 동물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쉴 수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필요했지만 가족들에게 그런 시간은 낭비이자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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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어다주는 인간에서 돈을 벌지 못하는 해충이 된 순간부터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전적으로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지만 이제 본인이 그 희생의 대가를 돌려받을 때가 되었을 때 모자라는 돈을 충당하기 위해 ‘닳도록 일하고 지쳐빠진 식구들’에게 그레고르를 보살필 시간은 없었다. 처음에는 하루 두 차례씩 청소되던 그의 방은 곧 잡동사니들을 쳐 넣어 놓는 창고로 바뀌었고 온갖 먼지와 쓰레기가 방을 가득 채운다.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던 그레고르가 쓸모없게 되어서야 몸이 아프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가족들은 하나 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들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레고르의 희생이 그 능력마저 무능화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그레고르의 헌신에 무능력자, 불구자가 되었다.


자신의 방을 청소해주는 동생과 어머니를 배려해 침대 밑에서 눈에 띄지 않게 생활하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방 밖을 나서는 모험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 모험은 그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 어머니가 기절하는 상황을 낳고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아버지는 그레고르의 등 뒤로 사과를 던지기 시작한다. 사과 한 개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히고 그의 몸을 서서히 죽이는 통증이 된다.

카프카는 고압적인 아버지와 껄끄러운 사이였고 그 관계가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카프카에게는 두 남동생과 세 여동생이 있었지만 남동생들은 유아기에 죽고 여동생들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다.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품는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 아마 여기에서 연유한 게 아닐까 싶다.


없는 살림에도 여동생을 꼭 음악학교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레고르에게 어느 날 저녁 들려온 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는 침체되어 있던 그의 마음을 뒤흔든다. 가세가 기울어 세 준 방 하나에 기거하던 하숙인들이 동생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가까이 가서 음악을 느끼고자 했던 그레고르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갈색 몸뚱이가 하숙인들의 눈에 띄게 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웃음거리이자 치욕거리가 된 그레고르는 오랫동안 굶어 바싹 마르다시피한 몸을 겨우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가고 그의 등 뒤에서 빗장이 큰 소리를 내며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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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의 부모는 돈벌이가 될 수 있는 하숙인들을 더 인간답게, 가족처럼 대한다. 평생 자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준 아들보다 그들의 편의와 안위를 선택한다. 이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불쾌한 감정만 일으키는 벌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고 가족들은 그레고르 없이 살아갈 날을 희망차게 계획한다.


만약 이게 오빠였더라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그가 그토록 아꼈던 누이동생이 말한다.


카프카가 어떤 의도로 그레고르 잠자를 해충으로 변신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그레고르가 노동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설이 우세하다. 묵묵히 수행하던 기능을,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통해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이 주변인들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어쩌면 가족을 위해 사회 안에서 벌레처럼 일만하던 그레고르가 서서히 본인을 해충으로 인식하기 시작해 그 모습으로 탈바꿈했을 수도 있다.


소설의 독어 원제인 ‘Die Verwandlung‘의 영어판 공식 제목은 ’The Metamorphosis’로 ‘변화’, ‘변태’ 또는 ‘변형’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어 제목인 ‘변신’ 역시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변화하는 수동적인 과정으로 보이는 위 단어들과 달리 왠지 모를 능동적인 힘이 느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변신하듯 그레고르가 자신의 의무를 내려놓고 자발적으로 변신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만족스럽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레고르는 성실하게 본인의 임무를 수행하던 사회의 모범적인 일원이었다. 특히 그의 성실함의 동기가 가족의 행복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는 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할 동안 그의 내면의 변화나 감정은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무시되었다. 그는 감정이 없는, 자신에게 감정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기계였고 그 기계가 작동을 멈췄을 때에는 연민조차 구할 수 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


그는 제법 쾌적하게 느꼈다. 온몸이 아프기는 했으나, 고통이 점점 약해져 가다가 마침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등에 박힌 썩은 사과와, 온통 부드러운 먼지로 덮인 곪은 언저리도 그는 어느덧 거의 느끼지 못했다. 감동과 사랑으로 가족들을 회상했다.


그 쇳덩이도 가족을 향한 감동과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 감동과 사랑이 고통을 이겼다.


『변신』은 그레고르의 변신을 통해 한 인간이 점차 하나의 벌레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한편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도 준다. 과연 나는 모든 이를 인간답게 대하고 있는가. 내가 그레고르의 가족이라면 그레고르를 더 인간적으로, 사랑과 배려로 대할 수 있을까. 선뜻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법학을 공부하고 십사 년 간 보험회사에 다녔던 경험을 바탕으로 카프카는 직장인에게 주어진 업무와 임무, 지친 심리를 더욱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 글을 써야했기에 만성 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예술가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고 철저하게 알았다. 현실세계와 예술세계를 모두 경험하며 그 두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숙인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처절하게 조롱당하고 버림받았던 그 날, 어두운 방 안에 먼지구덩이를 뒤집어쓰고 지내던 그레고르가 용기를 내어 바깥세상으로 나오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는 그레고르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인간성을 깨웠고 용기마저 북돋았다. 그레고르는 책임감을 내려놓았고 그로 인해 해충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 순간에도 예술을 사랑했고 그레고르 안에도 예술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레고르는 그 마지막 한 순간만큼은 인간일 수 있었다.


예술로 인해 인간은 고귀함을 되찾고 현실 속에서 비현실을 경험한다. 예술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한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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