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보내는 작별 또는 안부 인사

<슬픔이여 안녕> by 프랑수아즈 사강

by jiinko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참 좋아한다. 『슬픔이여 안녕』. 우리나라말로 보면 슬픔에게 이제 잘 가라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원작 프랑스어 제목은 ‘Bonjour Tristesse’, 영어로는 ‘Hello, Sadness’로 슬픔을 만났을 때, 또는 슬픔이 찾아왔을 때 하는 인사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지나칠 정도로 재능을 타고난 유럽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고 평한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이 18세에 첫 소설로 썼다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중간 중간 유치하게 보이는 듯한 문장들을 억지로 찾아내며 10대가 썼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궁상맞은 자세로 그녀를 애써 마뜩잖게 여기려 했지만 결국 그 시시하고 유치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0대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껴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었을 뿐 소설 속 묘사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했고 관능적이었으며 젊음이 넘치고 무엇보다 전적으로 솔직했다.


아버지와 함께 남프랑스에서 여유롭고 화려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열일곱의 세실은 죽은 엄마의 친구였던 안이 그 곳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세실의 아빠 레이몽은 마흔 살의 젊은 아빠로 엘자라는 20대 화류계 여성과 가벼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세 사람이 향유하던 삶에 질서란 없었다. 풍족하고 여유가 넘치는 삶 속에 술과 파티가 함께했고 세실은 그 삶에 흠뻑 물들어 있었다.

이런 삶에 불쑥 끼어든 안 라르센은 아버지 또래의 패션 디자이너로 세실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세련되고 현명하며 합리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엘자를 떠나 안과 결혼해 정착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자 세실은 자신들의 방종하고 자유로웠던 생활이 방해를 받을 것이라 생각해 안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털어내고자 자신의 친구인 시릴과 아버지가 이미 싫증을 느껴 떠난 전 애인 엘자를 이용해 음흉하지만 어떻게 보면 순진한 어린애의 장난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는 모종의 음모를 꾸민다.


세실은 안의 침착하며 지혜로운 모습을 동경하고 흠모하지만 그녀가 엄마의 빈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언제든지 부녀를 떠날 수 있는 가벼운 존재였던 엘자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위협감을 느낀 것이다. 세실의 유치한 연극이 계속될수록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에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녀의 의도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안은 어린 소녀의 철없지만 충분히 악의적인 계략의 희생물이 된다. 세실과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후 15년 만에 가정에 안정과 질서를 줄 수 있었던 안을 잃고 만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인 열일곱의 세실이 슬픔이라는 감정과 마주하며 그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진 세버그가 세실 역을 맡아 1958년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레이몽 - 엘자 - 세실 - 안


프랑수아즈 사강과 진 세버그


세실을 보며 프랑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장 콕토의 1929년 소설 제목에서 비롯된 말인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무서운 아이)’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태도나 행동이 영악하고 별난 짓을 잘하는 조숙한 아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아버지와 특별한 애착 관계에 있는 세실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인다. 이 무서운 아이들, 또는 소년소녀들은 자신들의 감정에는 충실하고 무서울 정도로 솔직하지만 타인의 감정에는 무감각하다. 자신의 안위와 충동을 충족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시릴, 엘자, 그리고 안의 감정과 존재를 희생시키는 세실에게서 이런 앙팡 테리블의 성향이 다분히 보인다. 평생 철부지로 향락과 본능만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던 세실이 안의 부재를 통해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소설의 결말은 일말의 안도감을 준다.


어쩌면 세실은 비극적인 결과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끓어오르던 청춘의 패기와 치기는 그 예감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10대 후반의 소녀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되기까지, 즉,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기까지, 주변사람들의 이성과 감성, 시간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세실은 슬픔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강에게 있어 슬픔을 성숙하게 대할 수 있는 때가 어른이 되는 때가 아닐까.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며 이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많은 감정들을 익히고 배우게 된다. 피상적이며 세속적인 20대의 엘자와 대조되어 40대의 안 라르센이 더욱 교양 있고 지적이며 품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건 결코 사강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고유한 취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는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과 그 감정을 대하는 능숙함, 그리고 그 감정의 덧없음을 깨달은 자의 모습에서 발산되는 아름다움과 매력은 사강의 또 다른 대표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잘 나타난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떨쳐버리고 싶다가도 음미하고자하는 은근한 욕망이 생기기도 하며 메말랐던 감정을 촉촉하게 만들어 잠들어있던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는 무난한 시간이 계속되면 무료해지면서 무언가를 희생하고 감내하면서도 삶에 자극을 주길 바라게 되는 묘한 순간을 만난다. 그럴 때 슬픔이 찾아오면 슬픔이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은 필수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항상 기쁘고 쾌활한 상태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도 있고, 평생 그럴수만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즐거움이 고요과도 같을 때가 있다. 때때로 찾아오는 슬픔과 울적함은 침잠되어 있던 감정과 아이디어들을 저어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떠오른 감정들을 종이 위에, 악보 위에 옮긴다. 그 감정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해 걷어내지 않으면 찌꺼기로 남고 만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감정을 솔직하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대 시대에 이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슬픔은, 또는 그 어떤 감정이건, 꼭 두려워하고 피해야하며 감춰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특히 남자들이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금기시되다시피 하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은 힘든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과묵히,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초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감정 표현의 부재는 소통의 부재를 낳는다. 다행히도 현대에 와서 감정표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이런 연유로 우리 아버지 세대가 유독 자녀들에게, 그리고 특히 어머니에게 무뚝뚝한 게 아닌지 생각한다.


메마른 감정의 우물에서 가끔은 슬픔을 길어내 음미하고 보듬으며 그 슬픔을 통해 또 다른,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성숙하게 받아들여지고 다뤄진 감정은 패권을 쥐고 우리를 군림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잃고 이성에 그 자리를 내줄 것이다. 가끔은 슬픔에게 작별을 고하고 가끔은 안부 인사도 할 수 있는 그런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슬픔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을 때까지 슬픔에게 인사하는 방법을 연습해야겠다.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왜 우리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