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살면 좀 다를까

by jiinko

남들보다 훨씬 늦게 바닷가 한달살기에 도전했다. 정확히는 24일로 이미 8월까지 꽉 찬 숙소들 중에서 운 좋게 바다까지 걸어서 5분인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한달살기를 제공하는 오션뷰 숙소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한적한,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곳에서 한 달 씩이나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니, 적잖이 놀랐다.


서울엔 내 집이 없다

강원도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나에겐 서울이 정신적인 고향이다. 서울을 너무 사랑해 평생 서울에 발붙이고 살 줄 알았다. 그렇게 믿었던 서울이 날 조금씩 밀어내기 전까진.

서울이 과연 사람을 위한 곳인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나이가 들수록 누가 사놓은 아파트가 두 배로 뛰었고 누구는 갭투자로 꼬마빌딩을 샀다는 이야기들이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고 비교하고 싶지 않아도 아직도 월세에 살고 있는 내 모습과 비교된다. 동시에 '나는 그동안 뭘 한 거지?'라는 질문이 떠오르는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일하고 놀았다'가 답이다.

경제관념이 어린아이 수준인 나는 청약통장의 존재도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알았고 치안이나 위치, 크기 때문에 조금 비싼 월세에 살아도 그로 인해 삶의 질이 높아지고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면 뭐가 됐던 될 줄 알았다. 즉, 일확천금이 생기지 않아도, 개천에서 난 용이 되지 않아도 열심히, 꾸준히 일하면 내 집이 자연스레 생길 줄 알았다. 그 꿈이 날뛰는 서울 집값에 의해 처참히 부서졌다. 부동산 관련 뉴스만 봐도 화가 났고 누군가 부동산으로 이득을 냈다는 얘기만 들어도 괜히 기분이 나빴다. 점점 여유를 잃고 분노가 가득해져 갔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양양에서 전혀 계획에 없던 서핑 입문 수업을 듣고 다시 서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며 내가 항상 그려오던 상상속 바닷가 집이 떠올랐다. 바닷가는 아직 덜 오염되지 않았을까. 아직 그 곳에는 내가 머물만한 '내 집'이 있지 않을까. 당장 서울을 버리고 영영 떠나진 못할지라도 한 달만이라도 살아보면 흔들리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는 있지 않을까.


다행히 나는 자유로운 사람

나는 프리랜서의 원형prototype이다. 누군가 프리랜서가 어떤 거냐 묻는다면 그저 나를 보여주면 된다. 바닷가가 성수기 시즌으로 붐비는만큼 나도 갑자기 밀려들어온 일로 한창 성수기를 보내고 있었다. 떠날 계획이 잡히자마자 일이 먼저 떠오르는 건 너무 당연했다. 하지만 프리랜서를 택한 이유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움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정리해 보았다. 서울을 떠나도 일에 지장이 없는지.


현재 하고 있는 일

1. 비대면 영어 강의(주 5회 이상)

2. 8월 초에 있을 공연 음악 작곡

3. 7월 안에 마무리 될 영상 음악 작곡

4. 빠르면 8월, 늦으면 9월에 출간될 책 집필 및 제작

5. 올해 안에 출간 될 에세이 집필


1번 영어 강의는 컴퓨터와 와이파이, 조용한 환경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통과

2번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데 역시 컴퓨터와 헤드폰만 있으면 된다. 혹시 리허설을 참관해야 한다면 서울에 한 두 번 올라올 각오도 되어 있고 타지에서의 작업을 편하게 해줄 작은 미디 키보드도 하나 샀다. 통과

3번 집에서 쓰던 큰 화면은 없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2번과 동일하니 역시 통과

4번, 5번은 서울보다 바닷가가 훨씬 더 유리하다. 영감은 자연에서 오니까.


일은 모두 통과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호들갑도 빠른 결정에 한 몫 했다. 모두 부러워 죽겠다는 눈치다. 바다 가서도 똑같이 돈 벌고 살 수 있다니. 얼마 전 우량한 아들을 출산한 친구의 '지금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말 역시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그 친구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당장' 떠날 것을 권유했다. 더 이상 기다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숙소를 예약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부모님을 달래고 떠났다.


만약 바닷가도 서울과 다를 것 없이 팍팍하다면 이 세상은 원래 그런갑다 하고 오히려 홀가분하게 서울의 내 아늑한 월세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한 달을 살아봤는데 바닷가가 너무 좋으면, 서울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이 든다면, 그럼 정말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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