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승자와 패자, 갑과 을. 세상엔 이분법적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참 많다. 요즘 들어 부쩍 뉴스에는 갑과 을이란 글자가 넘쳐난다. 사람들은 갑질한 이들에게 분노하고 을에게는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을이 약자의 입장이 되어 지지와 공감을 받고 보니 나중에는 을질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오며 을 안에서 그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또 나온다.
세상은 갑과 을의 관계에 예민하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구분 짓는 일에도 능숙하다. 난 집에 있어서 늘 을이었다. 집이라는 영역에 있어 소유한 자가 갑 아니면 누가 갑이겠는가. 나는 늘 갑의 눈치를 봐야 하고, 갑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 군말 없이 그곳을 떠나 또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야 하는 을이었고 지금도 그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온 지 햇수로 35년이 되면서 거쳐 간 집을 쭉 세어보니 총 스물일곱 개다. 38선 아래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강원도 도청소재지를 거쳐 서울, 동남아, 유럽 대륙에까지 나아가 스물일곱 개의 집에서 스물일곱개의 방을 경험했다. 늘 3년을 못 채우고 떠나는 나를 대신해 새로운 주인을 맞으며 그들은 나라는 사람을 잊었지만 난 모든 집을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한다. 종종 증오하기도 하고 종종 사랑하기도 했던 나의 모든 집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피 튀기게 싸우는 비싸고 귀한 몸이 되리라는 걸 상상도 못했을 테다.
이제 집 얘기만 나오면 다들 발끈하거나 귀를 쫑긋 세운다. 이유는 다를지언정 온 나라가 나만큼 집에 미쳐있다. 집을 탐하고 집에 집착하는 경쟁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집이 너무 좋아서 SNS보다 집 구경하는걸 더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상황이 무섭기까지 하다. 상황은 매일 더 팍팍해지고 마음은 조급해진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내 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한다. 떠나야 해서, 돌아갈 수 없어 아프다. 상상 속 꿈의 집이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떠나 있어 쓰리다. 기한이 되어 알람이 울리면 짐 싸고 잊어버리는 집이 아닌, 나라는 사람을 품어주고 기억해주고 나타내줄 집과 함께하고 싶은 소망이 그렇게 거창하고 터무니없는 것일까.
이 글은 집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 훌륭한 집이 생활방식과 삶까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꿈, 내 집이 없어서 한 맺힌 무주택자의 한탄이다. 갑과 을이라는 신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소유자와 빌린 자로 나누어지지 않은, 어떠한 설명이나 지위도 덧입혀지지 않은 그저 평범한 집에서의 삶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다.
내 삶은 머릿속에서만 그려왔던 집을 찾아 반복해서 떠나는 여정이다. 고단하고 고달픈 여정이지만 어쩌면 지키고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기에 언제든 다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때때로 지치긴 해도 적어도 지루하진 않은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