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추억

좋은 추억

by 바쁜 거북이

나는 여행의 기록을 ‘밴드'에 남긴다. 가족의 밴드 이름은 ‘전사의 집'이다. 내가 전사도 아닌데 이름이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나쁜 시력 때문이다.

분명 ‘천사의 집'이라고 입력했는데 나중에 보니 ‘전사의 집'이 되어있었다. 남편과 딸이 이름 잘 지었다고 했다. 늘 전사처럼 살아서 잘 어울린다고 한다. 그래서 굳이 바꾸지 않았다.


길을 걸으면 낙엽이 밟히는 게 계절이 가을임을 알게 하고 썰렁한 느낌마저 드는 날씨인데 오늘은 몇 해 전 여름에 갔던 ‘영광'이 떠오른다.


딸은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집에 없었고 남편이 무작정 여행지를 잡으라고 한다. 나는 남편 말을 잘 안 듣지만 ‘여행'이라는 말에는 잘 반응한다. 직장에 다닐 때여서 휴일에 시간을 내는 게 편했다. 남편에게 이번엔 어떤 느낌의 여행지를 원하냐고 물어보고 풍경이나 음식에 맞추어 후보지를 추린다.


상사에게 결재받는 느낌으로 남편에게 올리면 여러 후보지 중 남편이 ‘좋다'라고 말하는 곳이 여행지로 결정된다.


이번 여행지는 ‘영광'이다. 서너 시간을 운전한 남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숙소인 펜션을 찾아가는 길을 하필 구불구불한 산길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때문에 그는 더 열받아했다.


이 패턴을 잘 알고 있다. 숙소에 도착 후 식사를 하러 근처 식당에 들어서면 그때서야 기분이 좀 나아진다.


한여름 비수기라 그런지 음식점 안은 손님이 없었고 일하시는 분들만 주방옆에 둘러앉아 야채를 다듬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고, 영광굴비와 함께 먹음직한 반찬이 늘어서고 술을 곁들이면 그에게서 아까의 불쾌함은 모두 사라진다.


‘굴비'는 기대 이상이었다. 바삭하고 쫄깃한 식감이 입맛을 매료시켰고 다른 밑반찬도 맛있었다. 아들과 남편 그리고 나는 아주 만족한 식사를 했다.


남편은 식사 중에 ‘안주가 좋아서'라는 말과 함께 술을 들이켜고 나도 두어 잔 술에 살짝 취기가 돈다.


잔잔한 바다가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있고 배는 부르고 음악이 필요했다. 아들에게 음악을 주문하니 핸드폰으로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어주었다.


음악이 나오자 남편은 술기운인지 조용한 음악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나는 고지식한 사람인지라 얼른 앉으라고 손짓을 했지만 남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아무도 없어서 말리는 걸 그만두고 박수를 쳐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야채를 다듬던 직원 분들이 우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우리를 무장해제 시켰고 나와 아들도 남편의 무도회에 동참해서 즐겼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며 남편이 결제를 했고 나는 죄송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사장님은 사람 좋은 미소로 괜찮다고 해주었다.


식당을 나설 때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우리는 차가 다니는 해안도로 옆길로 조심조심 산책을 했는데 석양과 더불어 더위를 식혀주는 비 때문인지 더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어제 그 길을 다시 걸었고 가다가 본 ‘해장국'이라는 간판을 보고 식당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끝내고 다시 돌아오는 길은 우리와 같은 여행객들의 차로 복잡했지만 남편은 어제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마 성공적인 여행이었다는 생각과 이런 여행을 제안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그 기억이 내내 머릿속에 남아있었고 동참하지 못한 딸을 위해 한번 더 영광에 가자고 의견을 냈다.


그래서 3년이 지난 작년 여름에 우린 다시 영광으로 향했다. 이번 펜션은 딸이 알아보고 정했는데 아빠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딸은 어쩜 가는 길도 편한 코스로만 알맞게 잘 골랐다. 덕분에 남편의 짜증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이가 더 들어 감성이 풍부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에 갔던 식당은 이번 숙소와 좀 거리가 있어서 차를 타고 가야 했고 도착하니 식당 건물은 그대로인데 옆 빈 공터에 커피숍이 들어서 있었다.


식당 안은 성수기가 아님에도 손님으로 북적거렸고 우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전과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굴비는 여전히 맛있었지만 전과 다른 분위기 때문에 나는 예전의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달라진 느낌이다. 예전의 좋은 추억을 고스란히 느끼고자 했지만 무리였나 보다.


좋은 기억이란 정말 정교한 것 같다. 그날의 텁텁한 공기,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리고 손님이 아무도 없어 오롯이 우리만의 공간에서 음식을 즐기고, 심지어 마음껏 기분을 내고 그걸 즐겁게 받아들여준 직원분들까지 이렇게 다 맞아떨어져야 좋게 기억될 수 있으니 말이다.


딸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려던 계획은 살짝 어긋난 것 같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좋은 기억이 또 생겨날지 모르니 부지런히 시도를 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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