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나는 성격급한 엄마였고
그래서 기다림에 인색했다.
오래도록 아이 마음을 살피기보다
내 답답함 해결부터 하려고 했다.
아이를 이해하고 품어주기보다
내 기준에 맞게 고치려고 했다.
"빨리 해." (명령)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채근)
"1분 내로 못하면, 엄마 너저 갈거야." (경고)
"기다리는 거 안보여? 피해주면 좋아?" (죄책감)
"엄마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엄마도 힘들어." (푸념)
"너 학교에서도 이래?" (임의적 추론)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말로
아이를 다그치고 혼냈을 때
아이는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변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를 바꾸려고 했던 시도와 노력은
매번 헛수고였다.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엄마가 문제라면?
돌고 돌아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말의 문제를 인정하게 됐다.
변화의 대상을 아이에서 나로 옮겨오고 나서 부터
아이는 더디지만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학교에서는 빨리 먹어야 하잖아. 집에서는 느긋해도 괜찮아." (이해)
"10분 안에만 끝내도록 하자." (한계 설정)
"시간 내에 해냈네. 멋지다." (격려)
느릴 뿐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느린 아이에게 필요한 건
채근이 아닌 이해였고
화내지 않고 가르쳐주는 사람이었다.
초2 아들은 여전히 행동이 느리다.
급식 먹는 것도, 알림장 쓰는 것도,
줄서는 것도 다 늦고
운동회 달리기에서도 아들은 꼴지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기쁘기만 하다.
전보다 글씨를 바르게 쓰고, 멍때리는 시간이 줄었고
달릴 때 꼿꼿히 뛰는 것과 시간 내에 밥을 먹으려고 애쓰는 모든 것이
다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는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매일이 감격스럽다.
초2 연령에 당연히 해내야 하는 과제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해낸 것이
뭐 그리 기뻐할 일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제자리였던 시간,
부정적인 말로 상처를 주며 자책했던 날들이
나와 아이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감동할 수 있다.
아들은
성취에 집착하던 완벽주의자 엄마를
작은 성장에 기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이룬 게 없어도 내세울 게 없어도, 나는 행복하다.
아들 덕분에 내가 행복한 엄마가 됐다.
아이가 오랜 시간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씩 성장한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이의 성장이 기적같다.
매일 고맙다.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