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스스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최근 출간된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에서는, 인간과 AI의 차이를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비유한다. 연역법은 오류가 없는 명제로 또 다른 명제를 도출한다. 반대로 귀납법은 여러 정보(사실)을 취합하여 공통적인 패턴을 도출한다.
AI는 귀납법에 가깝다. 변화가 빠른 환경일수록 귀납법이 유리할 수 있다. 옳았던 전제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정보가 빠르게 쌓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방식은 귀납법과 연역법이 뒤섞인 모양새였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귀납법이 많았다. 경험에서 느낀 감정과 한계를 바탕으로 다음을 결정했다.
반대로 일상은 연역법처럼 살았다. 중요한 결정에서 결심한 목표를 전제로 두었다. 전제는 틀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중심은 목표가 되었다. 목표에 따라 하루를 유동적으로 정했고, 정신없이 살다보면 이루기도 했다. 무언가에 부딪히면 전제가 틀렸을까봐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나의 슬럼프는 항상 전제가 흔들릴 때 찾아왔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숭배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결국 자신을 잡아먹는다. 아름다움을 숭배하면 자신이 항상 못생긴 것처럼 느껴지고, 돈을 숭배하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 -
일종의 숭배와 다를바가 없었다. 전제와 멀어지면 삶의 근간이 흔들리기도 했다. 올해 여름 역시 그랬다.
1. 연역법식 일상은 행복의 빈도가 낮다.
인간은 항상 목표의 크기를 높게 잡는다. 결정을 내리고, 목표를 시작할 때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 귀납법으로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는 다를 거라는 기대감이 온 몸을 맴돈다.
기대감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연료가 된다. 연료가 소진되면 당황한다. 목표와 전혀 연관없는 행위로 소진된 연료를 채우기도 한다. 결국 목표를 이루는 시간이 의도치 않게 길어진다. 목표를 이뤘을 때 행복감을 맛보지만, 찰나에 가깝다.
2.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 역시 연역법식 삶을 허탈하게 만든다.
몇 년전 세운 목표가 지금과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성공의 기준, 사회의 인식이 물밀듯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다. 결국 내가 세운 목표가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제 믿을 것은 오로지 내 안에 쌓은 경험과 자산이라 말하기도 한다.
지금 이 시간이 "어떤 목표를 이루는가"가 아닌,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내가 작가가 되어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연역법식 일상은 "베스트 셀러가 되기 위해 글쓰는 시간"을 배분한다.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지 계속 확인한다.
귀납법식 일상은 "목표와 관계없이 특정 시간에 글쓰는 행위"를 한다. 그 글이 모여 어떤 결과를 이뤄냈는지 회고하고, 다음 시간을 계획한다.
물론 귀납법식 일상에도 이유는 필요하다. “글쓰기"와 "수영"을 랜덤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선택할 수는 없다.
단, 이유는 철저히 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자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간이 유일하게 손을 못대는 영역이 "시간"이다. 시간을 보낼 때 스스로 가장 충만하고, 자연스러운 행위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스티브 잡스 -
아이유는 스물다섯에 본인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스스로에게 실망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때보다 훌쩍 커버린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르겠다. 전제가 틀린 것 같은 상황이 오면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목표에 닿기 위한 연료가 떨어지면 "나는 아니다."라며 한계를 짓는다.우연히 새롭게 문제를 극복하면, "극복할 수 있는 건가?" 내심 기대 한다. 어떤 전제에 걸맞는 사람인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꼭 나를 미리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한계, 극복, 좌절 같은 단어를 자주 되뇌였다. 하나의 전제에 부딪히면 자동으로 나오는 단어들이다. 연역법식 일상을 참 성실히도 살았다 싶다.
양양의 물치항 앞바다에서, 이 단어로 점칠어진 시간들이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