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초보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2)
이벤트신을 보자 표정부터 구겨진 길마는 당연하다듯 름름에게 말했다.
“름름 어서 스킵해!”
“네? 뭘..”
길마의 눈에 당황하는 름름의 모습이 보인다. 가볍게 한숨을 쉬는 길마가 말했다.
“이벤트 신은 끝까지 안 봐도 된다고”
그러자 름름 앞에 ‘이벤트신을 스킵하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떴다. 름름이 손을 내밀어 ‘예’라는 문구를 터치했다.
‘최초 시청 시에는 스킵이 불가합니다’
“아앗! 이거 아직도 패치 안 한 거야?”
그렇다. 베르니아 판타지 개발자들은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든 연출 장면을 스킵하는 걸 싫어했다.
유저들의 편의 때문에 스킵 기능을 넣긴 했지만 그건 최소 한 번 이상 장면은 본 사람만 가능하게 해 놨다.
“후후. 길마, 이번엔 내가 이겼군”
대장 고블린이 느긋하게 족발을 뜯어냈다. 방금 구운 것 같이 김도 모락모락 피어났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식사야, 요즘 놈들은 전부 스킵부터 하니 입도 못됐거든.”
대장 고블린은 커다란 족발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더니 주변 음식들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하아, 이걸 또 보다니..”
“매번 진수성찬을 앞두고 한 입도 못 먹는 심정, 너 같은 유저 캐릭터들은 알리가 없지!”
길마가 ‘맙소사’ 제스처를 쓰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대장 고블린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다 름름과 눈이 마주쳤다.
“그쪽이 신규 유저인가 보군, 덕분에 잘 먹었네. 후후.”
길마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듯 대검을 땅에 꼽으며 말했다.
“평소보다 더 오래 먹는 것 같잖아! 어서 다음 신 진행해! 이 돼지 녀석아!”
대장 고블린은 길마의 으름장에도 여유 넘치는 식사를 마쳤다. 승리에 도취된 표정은 보너스였다.
“배도 부르고, 이제 소화시켜볼까. 크크.”
대장 고블린은 거칠게 일어나 남은 쟁반이 놓여 있는 상을 손으로 들어 엎어버렸다. 그러자 그 옆에 부하 고블린 다수가 등장했다.
“자, 준비해 름름!”
름름이 길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린 후 공격 자세를 취했다. 본격적인 보스 배틀이 막 시작되려고 한다.
“이벤트 신은 끝났다, 덤벼라 애송이들!”
대장 고블린이 근엄한 표정으로 름름과 길마를 가리키자 부하 고블린들이 ‘우우우으!’ 소리를 내며 두 캐릭터에게 돌진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길마가 살짝 고개를 돌려 름름에게 말한 후 다시 대검을 움켜쥐고 적을 향해 섰다.
름름, 아니 한호는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지금의 상황까지 왔는데, 도망치기보단 이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은 후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대장 고블린을 비롯해 다수의 부하 고블린들이 몰려오자 저절로 손이 긴장됐다. 그런 름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마가 나선다!
“어딜 지나치려고! 블로우 소드!”
길마는 고블린들이 자신보다 약한 름름을 먼저 공격할 것을 예측하고 미리 블로우 소드를 사용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크게 휘두른 대검, 그리고 붉은 잔상이 뛰어오던 고블린 사이를 쳐내듯 지나쳐 갔다!
무작정 돌진을 하던 부하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일부는 조금 당황한 듯 멈춘 후 상황을 지켜보기도 했다.
“저 파이터 놈, 여전히 잔머리를 쓰는군! 애들아 저 녀석부터 집중 공격해라!”
“하잇! 대장!”
대장 고블린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블로우 소드에 맞은 고블린들은 물론, 뒤에서 뛰어오던 적까지 합세해 길마 쪽으로 달려들었다.
블로우 스킬에 맞은 고블린들은 약간의 대미지를 입었지만 쓰러진 적은 없었다.
“름름, 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공격해!”
길마가 몰려드는 고블린들에게 대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래, 공격! 나도 할 수 있어!)
름름씨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자 푸른 기운이 피어 나왔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고블린을 향해 푸른 섬광을 발사했다!
‘펑!’ ‘크힛!’
고블린 한 마리에게 름름의 공격이 적중했다. 길마는 체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적부터 먼저 공격해 숫자를 줄여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
그때 길마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하나 지나갔다. 무언가 큰 덩어리 같은 그림자. 길마는 그게 름름을 향해 날아갔다고 생각했다.
“피해, 름름!”
그 순간 름름의 옆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날아와 큰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대장 고블린이 던진 상자였다.
산조각이 난 상자를 바라보는 름름. 다시 한번 전투 상황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런 빗나가다니.. 저 힐러는 운이 좋군! 흥!”
다소 열 받은 듯 대장 고블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나무 상자를 찾기 시작하고 있다.
름름은 다시 자신에게 상자가 날아올 것 같아 길마 옆 고블린 부하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길마는 자신의 레벨을 바탕으로 확실하진 않아도 조금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게 좋겠군, 근데.. 어디서 훔쳐온 거지?”
대장 고블린이 만족스러운 상자를 찾은 듯 기뻐하다가 불현듯 상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게 름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무심결에 집중한 탓일까. 름름의 손에서 푸른 섬광이 나가 상자를 보고 있는 대장 고블린 옆 어깨 부분에 명중됐다!
(헉, 나도 모르게 공격이 나갔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름름. 대장 고블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름름을 바라본다. 아주 고약한 인상인데, 더 험악해진다.
“그래, 오냐. 너부터 패주마.”
대장 고블린이 나무 상자를 버려두고 성큼성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은 길마의 눈에도 들어갔다.
“도망쳐 름름!”
놀란 름름은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길마 역시 자신을 둘러싼 고블린들의 공격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는 입장이었다!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대장 고블린의 한 손에는 먹다 남은 커다란 동물의 다리뼈를, 반대쪽에는 살벌하게 생긴 식칼-처럼 생긴-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런 비슷한 장면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고 름름, 아니 생각했다.
본업은 요리사인데 밤에는 사람을 전문적으로 잡는 그런 킬러가 나오는 영화였다.
(정신 차려, 강한호!)
름름이 양손의 자신의 볼을 빠르게 여러 번 쳤다. 볼이 ‘얼얼’해짐을 느껴지자 그제야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름름씨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대장 고블린이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과 함께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볼이 얼얼한 름름이 자신의 일반 공격을 대장 고블린을 향해 연속적으로 발사했다. 푸른 섬광들이 연달아 터졌다!
“겨우.. 그걸로 날 막겠다고? 흥이다!”
그러나 름름의 일반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대장 고블린. 대미지는 입은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질주해왔다.
(저, 저놈 뭐야!)
놀란 름름은 공격 자세를 풀고, 뒤로 빠져 달리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진지 밖으로 나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텅~!’
(이, 이건 뭐야..)
진지의 거의 입구까지 도망간 름름씨 앞을 투명한 벽이 가로막았다. 보스전이 시작돼 필드 이동 제약이 걸린 것이다.
(도.. 도망칠 수 없어!)
그러자 뒤에 름름을 내내 쫓아 뛰어 숨이 가파른 대장 고블린이 겨우 한마디 던졌다.
“뭔.. 힐러.. 놈이.. 이리.. 빠르냐. 헥헥.. 어쨌든 잡았다.. 헥.. 하이구.”
숨을 헐떡 거리고 있지만 오직 름름만 쳐다보고 있는 대장 고블린을 피해 달아나는 건 더 이상은 무리였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름름의 머릿속이 온통 하얘졌다. 이 상황까지 오니깐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그런 판단까지 든 것이다.
“헤엑.. 너부터 보내주마! 잘 가라! 힐러!”
멍하게 망설이고 있는 름름의 머리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식칼이 빛에 반사돼 번뜩거렸다.
(망했다!)
완전한 절망, 꼭 중요한 결승전 마지막 승부에서 상대방의 샅바를 놓친 것처럼 같은 그런 암담한 상황이었다.
“름름!! 정신 차려!! 그걸 쓰라고!!”
름름의 상황이 길마에 눈에도 들어오자 주변의 고블린을 밀어내며 외쳤다.
(아! 맞아. 씨름 기술!)
그렇다. 름름 아니 한호에겐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씨름 기술이 있었다.
천하장사를 얻기 위해선 자신보다 높은 체급과의 선수와의 경쟁이 불가피한 것이 바로 씨름이다.
종전 부대장 고블린에게 작렬했던 ‘왼배지기’처럼 대장 고블린에게 쓴다면, 지금의 위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차세대 유망주의 저력을 보여주마!)
“뭐, 뭐냐 니 녀석!”
이를 꽉 무는 름름. 그리고 아주 빠르게 대장 고블린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허점투성이인 상대방 사이로 들어가는 건 쉬웠다!
그리고 샅바는 아니지만 대장 고블린 허리춤의 잡기 좋은 가죽 벨트를 양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으아아!!!”
엉덩이 부분을 대장 고블린 배 밑으로 깊숙이 밀어 넣은 후 름름이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어 당겼다. 완벽한 ‘엉덩배지기’ 자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놀란 건 대장 고블린이었다. 중거리 지원형 힐러가 갑자기 근접 ‘잡기’ 공격이라니?!
(완벽한 손맛! 다시 한번!!)
한호는 느껴졌다. 샅바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초등학교 시절 자신보다 큰 덩치를 엉덩배지기로 던질 때 그 느낌이었다.
“름..름? 너, 뭐.. 하는 거야?”
그때 길마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잘못됐나. 름름은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봤다.
“으아!!!!!!”
전혀 흔들림 없이 편안하게 서 있는 대장 고블린. 그의 몸 주변에 녹색 연기와 같은 효과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그렇다. 이 게임에는 씨름 기술 따윈 없다. 름름은 아까 길마에게 했던 것처럼 대장 고블린에게 힐 스킬을 시전 해버렸다.
“아아.. 처음 느껴보는, 천상의 기분이다.”
황홀한 표정에 사로잡혀 있는 대장 고블린의 얼굴이 름름의 시선에 딱 잡혔다. 초 단위로 대장 고블린 체력도 차곡차곡 회복됐다.
(마, 망했다!)
대장 고블린의 넋이 조금 나간 틈을 이용해 름름이 옆으로 돌아 벽을 마주 보는 상황이 됐지만 전세는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살짝 홍조 띤 얼굴의 대장 고블린이 천천히 뒤돌아 서며 말했다.
“이 좋은 걸 너희들만 써왔구나.”
이 모든 상황을 어이없게 지켜보던 길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곧장 대장 고블린 방향으로 스킬 ‘블레이드’를 썼다!
높게 점프한 길마가 화염 불길과 함께 대검이 대장 고블린 머리로 향했고 이내 강력한 내려 찍기가 터졌다.
“크헉! 이놈이!”
블레이드 스킬이 작렬하자 대장 고블린은 휘청거렸다. 아까의 홍조 띤 얼굴은 이내 험악한 인상으로 변했다.
“자, 름름! 저쪽으로 뛰어! 도망이다!”
블레이드 스킬 특징인 넉백이 터져 틈이 생겼다고 판단한 길마가 고블린의 포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었다.
“한심하군, 길마!”
그러나 곧바로 대장 고블린의 식칼이 길마와 름름 사이로 날아들었다. 길마는 멈춰 있던 름름을 밀어낸 후 뒤로 빠졌다.
(뭐야, 넘어지지 않았잖아?!)
밀려 넘어진 름름과 겨우 공격 자세를 다시 취한 길마 사이로 대장 고블린이 땅이 박혀 있던 식칼을 빼며 말했다.
“이봐 길마. 나 이래 봬도 챔피언 등급이야.”
(아! 맞다!)
대부분의 MMORPG 속 보스 캐릭터들은 기절이나 또는 넉백(Knock-Back) 같은 일종의 속성 공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보스 특유의 공략의 재미를 넣기 위한 장치다.
“바, 방심했다! 름름 어서 일어나!”
소리치는 길마의 얼굴 방향으로 대장 고블린의 거대한 동물 뼈가 날아왔다. 놀라 몸을 숙이는 길마 위로 아슬하게 지나쳐 간다.
“!!”
그러나 두 번째 공격이 연달아 들어오는 건 계산하지 못했다. 몸을 숙이고 있는 길마의 머리로 거대한 식칼이 내려오고 있었다.
“죽어라, 이 파이터 놈아!”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 길마.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거대한 식칼이 내려오는 곳에 온몸에 푸른 기운이 흐르는 름름이 서 있었던 것이다!
“!!”
름름은 대장 고블린의 거대한 오른손을 받아내듯 당기며 동시에 몸을 반대로 비틀었다.
내려오던 팔의 힘 때문에 역동작에 걸린 대장 고블린의 몸이 크게 기울었고, 그 타이밍에 름름은 허리를 내리며 엉덩이를 올렸다.
그러자 엄청난 속도와 함께 대장 고블린이 름름 위로 회전하듯 넘어갔고, 곧바로 바닥이 내리 찍혔다!
‘퍼어억!’
“크으으흐헉!!”
대장 고블린의 숨 넘어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땅이 움푹 파일 정도로 강력한 기술 ‘업어 던지기’였다!
“채, 챔피언 등급인 내가.. 한방에 죽다니..”
바닥에서 꿈틀거리듯 겨우 움직이던 대장 고블린이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 앞에는 푸른 기운이 흐르는 름름이 서있다.
업어 던지기. 상체를 내밀고 손기술을 걸어오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상대 오른팔을 잡고 몸을 돌려 상대를 업은 후 바닥에 던지는 카운터성 기술이다.
“으, 으아 괴물이다! 도망쳐!”
입을 다물지 못한 길마의 뒤로 고블린들이 놀란 듯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마 보스 전투 종료 조건이 ‘대장 고블린 격파’였기 때문. 그들은 바닥에 은화의 물약을 떨어뜨리며 진지 밖으로 사라졌다.
대장 고블린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곳에는 은화를 비롯한 각종 전리품만 남게 됐다. 포쉬의 ‘소중한 망치’도 보였다.
“또, 또 사용했잖아. 그 기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길마가 름름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때 몸에 있던 푸른 기운이 사라진 름름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 름름 괘, 괜찮아?”
순간 길마가 뛰어가 부축했지만 름름은 기운이 전혀 없는 듯 축 늘어졌다.
(혹시 이 녀석 핵을 쓰는 거 아냐?)
길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강력한 기술을 2 레벨 캐릭터가, 그것도 근접이 아닌 힐러 캐릭터가 쓸 리가 없기 때문.
핵 프로그램은 클라이언트나 일부 데이터를 해킹해 대미지나 속도, 또는 체력 무한 등 상황을 만들어 게임을 유리하게 만드는 일종의 불법 치트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맥이 풀린 듯 지쳐버린 름름에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 어떻게 됐어요? 대장 고블린..”
길마에게 기대어 있던 름름이 겨우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다 끝났어. 우리가 이겼다고!”
길마가 고개를 끄덕 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름름의 대활약(?)으로 그녀의 첫 번째 보스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름름은 그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잊히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손맛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