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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Feb 12. 2024

기억 속에 갈무리해야 할 엄마 집밥

그 남자의 요리생활

후회는 모든 자식의 숙명 같은 것이다. 부모는 하나라도 더 해주지 못함을 아쉬워하지만 자식은 그때 왜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을까 하고 자책한다. 스스로도 부모가 되고 나면 내 부모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더 커질 것 같지만 부모 역할과 자식 역할은 서로 다른 장르의 드라마와 마찬가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살갑지 못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한테 살가움보다는 출세(!)로 즐거움을 찾으셨으니 적당히 좋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고 제법 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고 사는 걸로 최소한의 불효는 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 한상을 어쩌다 받고 나서 뒤돌아 생각해 보면, 밥 맛있다, 역시 엄마 밥이 최고다, 이 밥 먹고 싶었다와 같은 말 한마디 못한 걸 후회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런저런 농장과 농사일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소일거리 치고는 넓은 땅에서는 할 일이 많다. 인력 시장에서 사람을 구해다 쓸 수도 있지만 어떤 일은 아들들의 손을 타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설이든 추석이든 명절에 내려가면 엄마는 항상 나와 동생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구비해 놓는다. 그리고 한두 시간이면 끝난다며 우리를 독려하는데, 수십 년째 이어온 역사와 전통의 거짓말에 우리는 속지 않고 속아준다. 한두 시간이든 서너 시간이든 어차피 해야 되는 일로 정해져 있으니까.


겨울은 농한기지만 봄에 겹친 겨울, 자두 농장에는 지난봄부터 ‘저요, 저요’ 하면서 경쟁적으로 하늘로 치솟은 가지들을 쳐내야 한다. 자두나무 하고 싶은 대로 두면 소출도 적고 관리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려서 농장 바닥에 아무렇게 흩어져 있는 가지는 가지라는 이름답게 가지런하게 모아서 단으로 묶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우리가 오기 전 엄마가 다 마무리했다. 한두 시간 걸린다는 엄마의 (거짓)말에는 적어도 이 일은 당신이 다했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그 단을 모두 모아서 마당에 잘 쌓아두는 것. 장작 쌓듯 마당에 부려놓으면 몇 달을 마르고 말라 돌아오는 초가을부터 엄마가 동네 아줌마(할머니들이지만 아지매라고 부르는 분들이니까 아줌마라고 하자)들과 함께 치매방지를 위한 그림 맞추기 활동을 하는 황토방에 군불로 들어갈 것이다.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 엄마가 점심 상을 차렸다. 밥부터 고봉인 걸 보니 아들이 아니라 일꾼밥이 확실하다. 내일이 설이지만 차례음식과는 무관한 엄마의 시골밥상이다. 특별히 뭘 따로 준비한 건 없고 그냥 있는 반찬으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자고 재촉한다. 있는 반찬이라뇨? 수산유통을 하는 뒷집 형님이 주신 알로 끓인 맑은 알탕. 잘 익은 김장김치와 총각무, 엄마 농장에서 키운 깻잎을 삭혀 만든 깻잎김치. 새로 담근 고추장으로 만든 오징어진미채. 노릇하고 간간한 갈치구이. 물엿이 잘 밴 멸치볶음. 포슬포슬한 감자가 으깨져서 더 맛있는 돼지갈비찜. 대충 차렸다고 주장하지만 엄마 밥상은 늘 이런 식이다. 시골 분이라 그런지 국은 늘 빠지지 않고, 김치는 서너 가지가 기본이다. 마른반찬은 항상 준비되어 있고 고기와 생선도 빠지면 섭섭하다. 뚝딱뚝딱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밥상이다. 젓가락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고민되고 대식가는 아니지만 밥 줄어드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반찬 하나하나를 음미하게 된다.


집에 내려갈 때마다 먹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시골밥상이지만 언젠가는 비싼 돈 주고도 못 먹을 그리움이 되겠지. 그때 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 용돈 몇 만 원 못 드린 걸 후회할 게 뻔하지만 만시지탄은 언제나 자식의 몫이라 여태 철드는 중인 아들은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글이라도 쓰며 엄마 밥상을 기억 속에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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