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는 고향을 사랑하고 지키고
원래 계획은 왕궁리까지 걸어가는 것이었다. 거리는 고작 6km. 빠른 걸음으로는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가는 중간에 카페에서 카페인을 보충하면서 여행기도 일부 정리할 수 있기도 해서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게다가 시골길을 걷는 건 몸과 마음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니까 여러모로 훌륭한 계획이라고 자찬했다. 하지만 세월만큼 날씨 앞에도 장사가 없다. 묵직한 회색 하늘은 오후 2~3시쯤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거의 증명하고 있었다. 우산은 있었지만 대중교통이 성층권 공기만큼 희박한 곳에서 비를 맞으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을 것 같아서 과감히 접었다. 익산역 관광안내소에서 이 버스 안 타면 손해라는 심정으로 권하던 그분의 안타까워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익산시에 운영하는 시티투어 버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도시의 근사한 모양의 대형버스(가끔 2층도 있는)가 아니다. 서울의 산동네나 부산의 산복도로를 누비는 작은 마을버스 크기다. 20인승은 될라나? 하지만 이 버스는 야무지고 알찬 버스임에 틀림없어서 익산에 다녀온 뒤로는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고 있다. 익산엔 차 안 가져가도 된다. 기차 타도 충분하다. 2월부터 12월, 주말과 공휴일에만 운영하는 시티투어 버스의 행선지는 익산역, 원불교 총부, 고스락, 교도소 세트장,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보석박물관, 익산역이다. 첫 차는 9시 50분, 막차는 4시 20분에 익산역을 출발한다. 익산역부터 가만히 앉아 있으면 1시간 50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놀라지 마시라, 가격은 1회권도 아니고 1일권이 단돈 2천 원. 익산시민, 초중고, 경로, 군인, 장애인, 어린이는 1천 원이다. 1일권답게 표를 한 번만 사면 아무 때나 타고 내리면 된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내려주지는 않는다. 심지어 입장료가 3,000원으로 표값보다 비싼 익산보석박물관도 이 표만 보여주면 입장권으로 바꿔준다. 공짜다. 개꿀도 이런 개꿀이 없다. 익산시청에 인사부터 해야겠다. 감사합니다. 이런 훌륭한 시티투어 버스를 운영하고 있어서. 익산의 명물은 시티투어 버스다!
버스는 미륵사지 앞에 정확한 시각에 도착했다. 익산시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세 분도 같이 탔는데 앉다 보니 옆자리 뒷자리였다. 딱히 대화에 낄 수는 없어서 엿듣고 있었는데 지나는 곳마다 이 동네가 원래는 안 이랬다, 이 집 가게 사장님이 어떻게 되었다, 그 마을에 누가 어떻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마치 라디오 공개방송처럼 들렸다. 소풍을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할머니들과 왕궁리 유적에 같이 내렸는데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더니 외진 곳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깔깔대며 재미있게 노시더라. 왕궁유적에서 저성방가 하시는 할매들이 어찌 보면 괴이할 수 있는데 누군한테 해를 끼치지 않고 그렇게 서로 정답게 어울리며 즐겁게 사시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단돈 천 원으로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왕궁리 유적에도 석탑이 주인인 양 서 있어서 사람들은 대개 거기서 사진을 찍고 돌아간다. 왕궁리 오층석탑도 국보 289호로 지정된 국가유산이다. 주춧돌과 기단만 남은 쓸쓸한 터에 석탑 하나 오롯이 서 있으니 허전한 가운데 아쉽지는 않다. 휑한 공간에서는 볼 것은 많지 않지만 상상은 자유롭다. 왜 하필 이 자리였을까? 누가 살았을까? 어떤 건물이 있었을까? 본 사람은 다 죽고 없으므로 내 맘대로 생각해도 좋다.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 30만 점을 백제왕궁박물관 앞에 쌓아 두었는데 그것 역시 장관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은 새 건물에 깔끔하고 제법 으리했지만 조금 더 알찬 내용으로 채웠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박물관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커피 한 잔을 곁들이고 싶을 만큼 좋았다. 일기예보 대로 비가 와서 걸어가야 하는 쌍릉은 포기했다. 무왕 어르신은 다음에 뵙기로. 대신 다시 버스를 타고 계획에 없던 보석박물관에 내렸다. 마침 비도 너무 세게 와서 실내에서 비를 피하면서 할 거리가 필요했고 어차피 시티투어 버스 일일권으로는 공짜니까. 보석박물관은 생각보다 신기한 볼거리들이 많았다. 보석이라고 해봐야 수정, 사파이어, 오팔 등등 정도 들어봤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광물이 보석으로 쓰이고 있고 모양도 색도 어쩜 그렇게 예쁜지. 관람이 끝나면 곧장 보석과 장신구를 파는 가게들이 모인 곳으로 이어지는데, 토요일인데도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속에서 사장님들은 활기가 없었다. 내 행색은 어딜 봐도 보석에 지갑 열 사람으로 안 보였는지 호객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아서 마음껏 눈으로만 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옆에 붙어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시내로 들어왔다. 저녁을 사준다는 분을 만나기 전에 역 앞에 있는 익산근대역사관으로 향했다. 익산근대역사관은 구 삼산의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삼산 김병수 선생이 1922년에 개원한 병원 건물이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지금 있는 곳으로 건물을 잘라서 옮겨왔다고 한다. 건물 자체도 외관도 멋스럽고 이국적인데 이 역사관 자체가 익산의 의로운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관 안에는 근대 이리의 출발부터 근대농업과 수탈의 역사, 항일운동이 주역들 이야기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속마을이란 뜻의 솜리를 한자로 옮겨 이리(裡里)라고 불렀고 그 마을 이름이 시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한자가 생소해서 찾아보니 裡는 가운데, 안쪽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는 그 한자가 들어간 말은 성황리, 암암리, 극비리 등등이 있었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익산에는 특히 의로운 인물들이 참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역사관에서 해설을 하시는 분도 참 인상적이었다. 마침 관람객이 나밖에 없어서 이 건물과 익산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해설사로 일을 하시니 당연히 지식은 많으시겠지만 익산에 대한 설명 한 마디 한 마디에 내가 나고 자란, 내 아이들이 커가고 있는 이 고장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우리 익산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갖고 알기 위해 다니며 공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에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한사코 이름은 안 밝히신 윤선생님도 익산 사랑만큼은 역사관 안에 걸려 있는 익산 출신 여러 의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감동은 역시 사람한테 받는 법이지.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익산은 철도가 생기고 기차가 지나다녀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익산은 든든하게 꽉 찬 도시예요.” 네, 맞습니다. 익산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윤선생님 같은 분들 덕분에 꽉 찬 도시인 것 같습니다.
어쩐지 (익산 말고) 이리 출신 선배 SC, 친구 JJ, 후배 JH의 이리부심(이리+자부심)이 남달랐던 이유가 있었다.
일정
05:50 집에서 출발
06:37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
09:46 익산역 도착
10:13 41-1번 버스 타고 미륵사지
11:00 미륵사지 도착, 맛동미륵산순두부 점심
14:10 시티투어 버스 미륵사지 출발
14:20 왕궁리 유적지
15:20 시티투어 왕궁리 유적 출발
15:35 보석박물관
16:00 보석박물관 카페에서 휴식
16:35 보석박물관 출발
17:10 익산 시내 도착
17:20 익산근대역사관
18:00 저녁식사
19:25 익산역에서 호남선 ITX
22:05 영등포역 도착
23:00 집에 도착
비용(62,050원)
집-영등포 버스 1,200원(조조)
영등포-익산 무궁화 15,600원
익산역-미륵사지 버스 1,550원
점심 순두부 11,000원
미륵사지 카페 4,000원
시티투어 버스 2,000원
보석박물관 카페 3,500원
익산역-영등포역 ITX 23,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