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혼자 소도시 여행(번외 편)
어떤 황망한 죽음은 다가온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될지도 모를 또 어떤 죽음은 나를 공포로 짓눌렀다. 저 멀리 메아리처럼 들리지도 않던 죽음이 나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일상 속의 삶에 작은 단절이 필요했다. 어디든 가야 했고 나는 함양(정확히 말하면 지리산)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어머니 지리산이 있고 그 지리산에 기대어 살며 한결같이 넓고 따듯한 품을 내주는 큰 나무 TO님이 있으니까.
함양 하고도 지리산 칠선 계곡이 있는 마천까지 가는 길을 의외로 쉽다. 큰 도시까지 기차나 버스를 타고 거기서 다시 드문드문 오가는 시골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지리산 백무동 가는 버스를 타기만 하면 함양읍, 남원 인월면을 스쳐 다시 함양읍 마천면에 데려다준다. 거기서 지리산 다섯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TO님의 ’나마스테‘까지는 걸어도 30분, 마천 택시를 타면 5분이면 닿는다.
특이하게도 서울에서 내려오는 표는 어플로 예매가 되지만 마천에서 동서울로 가는 버스만큼은 현장에서 미리 끊어두어야 한다. 매표소(사실은 고속버스 표도 파는 슈퍼였던)로 들어서서 사장님을 불렀다.
“촌할마씨한테 뭘라꼬 사장님이라 캅니까? 그냥 부르마 되지.“
몇 해 전 버스표를 끊었을 때 봤던 그 노파다. 그때는 할아버지도 계셨는데 돌아가셨는지 출타하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최근에 오른쪽 팔을 다쳤는지 누빔 조끼 주머니 속에 든 손이 나올 생각을 않는다. 18시 10분에 떠나는 막차는 프리미엄 고속버스인 걸 이미 알고 왔지만 그 차는 일반보다 요금이 비싸다며 오해가 없도록 말하자면 유의사항을 고지해 준다. 선량한 관리자로서 고지 의무를 다하고 있는 셈이다. 동서울-지리산 노선에도 프리미엄 고속버스가 운행을 시작한 것이 시골 동네에서는 작은 사건이었는지 프리미엄 고속버스 첫 차를 타고 마천에 내린 손님의 이야기를 살짝 들뜬 목소리를 알려준다. 신작로에서 30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우리 동네까지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들러가기로 결정되고 처음으로 버스가 들어온 저녁, 마을회관 앞마당에서는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여 잔치를 벌였다.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돌리고 전도 부치고 깽마구(사물놀이)도 쳤다. 정월대보름 노래자랑대회급 이벤트로 동네가 들썩했고 버스 기사에게는 꽃다발인지 화환인지가 전해졌던 것 같다. 그게 한 40년 전 이야기인데 작은 시골에선 작은 일도 기념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싶다.
노파는 버스회사로 전화를 걸었고 차 시간과 인원을 일러주고 좌석번호를 받았다. 한쪽 팔이 불편한 노파를 대신해 차표에 날짜, 시간, 행선지, 금액, 좌석번호는 내가 적었다. 종이가 자꾸 무딘 볼펜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류소 보관용, 버스기사 제출용, 승객 보관용, 3단으로 구성된 버스표에서 정류소 보관용을 남기고 끊었다. 표를 끊는다는 말이 아직은 유효한 곳이다. 한 때 슈퍼 겸 버스표 판매소였던 곳의 매대는 텅텅 비어 있었고 또 몇 해 지난 뒤에 오면 그 자칭 촌할마씨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촌할마씨‘의 가게엔 공포가 아닌 섭리로서의 죽음이 건조하게 걸려 있었다.
TO는 삶이라는 글자를 종종 붓글씨로 멋지게 써서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나 내가 갈 곳은 삶의 의지로 충만한 그의 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집 곳곳에는 그가 쓴 삶이라는 글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나마스테! 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의 집 이름이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남의 나라 말인데도 따스함이 건너왔다. 집은 비어 있었고 지금 진주에 있다는 TO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 뭔가를 특별히 하려고 온 건 아니었다. 허기를 느낀 나는 살기 위해 그의 찬장을 뒤져 안성탕면 하나를 끓여 먹었다. 지리산을 눈앞에 두고서 딱히 무슨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슬픔과 두려움을 가슴속에 담아둔다 하여 그것들이 가셔지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쏟아내 보는 건 또 어떤가. 나는 어렵게 TO님의 오디오 시스템에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슬픈 노래 몇 곡을 틀었다.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나마스테 거실 통창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빛과 소금’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를 따라 부르다 내 곁에서 떠나간 사촌형이 그리워 꺼이꺼이 울었다. 지리산 앞에서 나의 울음은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지만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눈물이 마를 즈음 신발을 고쳐 신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를 건너 벽송사 방향으로 걸었다. TO님을 처음 만났을 때 걸었던 구간이다. 지리산 둘레길의 흥행(!)이 예전 같지 않아 올레꾼은 보이지 않았고 조용한 마을길과 산길을 걷는 내내 정경은 평화로웠다. 머릿속엔 따로 무슨 생각이 들지 않았고 울음으로 다 토해내지 못한 무겁고 복잡한 감정만이 가득해서 눈빛을 잃고 좀비처럼 걸었다. 그러다 돌아오면서 길을 잘못 들어 나무를 헤쳐가며 겨우겨우 어렵사리 큰길로 내려왔다. 왜 길도 아닌 곳으로 접어들었고 끝까지 고집스레 거기로 갔는지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진주에서 볼 일을 마친 TO님이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6시 10분에 끊어 놓은 막차를 타기엔 너무 아쉬워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고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 속을 잘 아는 속 깊은 아내는 군말 없이 그러라고 했다. 마침 TO님의 친구 SP와 캐나다에 사는 그의 아들 JY가 서울서 ‘나마스테’로 놀러 왔다. SP와는 몇 해 전 ’나마스테‘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의 아들 이야기도 좀 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면소재지로 나가 장을 봐와서 저녁을 지어먹었다. 나는 잡채를 만들었고 식당에서 일을 한다는 JY가 돼지두루치기를 했다. 그 녀석 솜씨가 참 좋아서 다들 맛있게 한 그릇씩 뚝딱했다. 오늘 밤에 잠이 오든지 말든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TO님의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셨다. 어둠이 내려온 밖에서 지리산은 더 조용하고 묵묵해졌다.
우리는 밥을 먹고, 커피와 차를 마시고, 노래를 듣다가 따라 부르고, 수다를 떨다가 울기도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시간이었고 일상 밖의 또 다른 일상이었다. 거기서 나는 안전함을, 따뜻함을, 편안함을 느끼며 TO님이 눈빛과 몸짓과 말로 건네는 위로를 남김없이 흡수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나는 늘 혼란스럽고 불안하지만 어쩌다 맞이하는 다른 이의 죽음이 알려주는 삶의 명징함을 지리산에서 배워간다. 그곳은 볕이 남김없이 가득한 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