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그 뜨거움이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한때 냉면에 대한 면스플레인들의 사랑과 애착은 대단했다. 어떤 특정한 음식에 대한 논쟁과 이해의 깊이와 넓이가 확장되는 것은 우리 음식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서울의 주요 노포들을 중심으로 냉면맛집들은 발견되고 확대재생산 되었다. 서울에만 유명 냉면집이 있을쏘냐 할 만한 지역이 바로 진주. 서울의 평양냉면과는(서울의 서울냉면이 아니라 평양냉면이라니) 장르가 다른 진주냉면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주었다는 평가를 현지인들로부터 받는 산홍냉면이 마침 공교사 후문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침 점심 때이기도 했고.
스타일 좋은 주인장이 일구어 놓은 진주냉면의 명성에 걸맞게 식당은 장소(면 단위)와 시간(초봄)에 관계없이 붐볐다. 대표메뉴인 산홍냉면을 먹었다. 그랬다. 현지인들이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진주는 제법 큰 도시이고 금산면은 궁벽진 시골이 아니라 읍내급이라 시내버스가 자주 있었다. 대중교통의 연결망이 촘촘하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축복이다. 다음 목적지인 진주성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금세 왔고 전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후불 교통카드는 편리했다. 지역색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 하다가도 이런 편리함 앞에서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절로 읊게 된다.
진주하면 남강이었고 남강 하면 촉석루와 논개를 떠올렸지 진주성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촉석루는 진주성의 일부일 뿐이었다. 진주에 가게 되거든 진주성이 아니라 촉석루에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논개가 가락지 낀 손으로 왜장을 끌어 안고 촉석루 앞 의암에서 남강으로 뛰어든 이야기는 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라는 큰 맥락 속에서 인식했어야 옳다. 버스에서 내려 거대한 진주성의 성벽을 마주한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래 촉석루 말고 진주성!
진주성 입장료는 겨우 2천원.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까지 가능하니 참으로 은혜로운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진주성 전투의 영웅 김시민 장군 전공비가 있다.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를 설명해 놓은 안내판을 먼저 읽으면 기초학습을 이수하게 된다. 그대로 쭉 가면 남강이 눈앞이다. 심화학습을 위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지나 박물관으로 향했다. 30여년 전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가 가야박물관으로 기억하는 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의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마 예전에는 가야의 유물을 많이 전시했던 것 같다. 질리지 않을 아담한 크기의 박물관에는 임란의 역사부터 갖가지 무기와 유물, 기록들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안내된 관람의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동북아 3국의 시각과 전쟁의 참상, 군사들과 백성들의 피눈물 나는 저항의지를 엿볼 수 있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저절로 심화학습이 된다. 임진왜란에 특화된 지역 박물관으로서의 좋은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맘에 쏙 들었던 것은 마지막 방이었다. 출구 직전에 있는 방에서는 커다란 벽면 전체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만들어진 토기와 자기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개별 유물에 대한 설명보다는 수천년의 세월이 축적된 그릇들을 담담하고 대담하게 보여주면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특별한 설명을 달지 않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선사시대, 그 다음부터는 삼국시대, 그리고 저 끝은 조선시대 정도로만 구획을 나눠놓고 그저 그냥 감상하고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고 어려운 말들도 없어 좋았다.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기분 좋게 그 방을 나서려는데 오른쪽 벽 눈높이에 걸려있는 안내판이 마지막 감동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의 전시는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데 주력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딱딱하고, 재미 없고, 피곤하다’는 따끔한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국난을 극복한 승리의 역사”라는 패러다임이 주목 받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승자와 패자라는 관점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기보다는 ‘전쟁의 실상’을 알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공영'을 위해 고민해야하는 것이 이 시대의 명제임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 11월 2일 ‘가야문화연구의 중심기관’을 표방하며 문을 열었습니다. 1998년에는 임진왜란 전문 기관으로서 특성화하였고 2008년, 2018년 두 번에 걸친 전시개편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재단장하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딱딱한 역사적 사실의 전달보다 편안한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시대의 대명제를 전시로 풀어보고자 시도했지만,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댜 무엇보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구축을 위해서는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유구한 교류의 역사를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댜 어린이를 위한 전시공간도 만들어야 합니다. 교육과 행사를 운영하기 위한 편의공간의 확충도 국립진주박물관의 시급한 과제입니다. 아직은 숙제가 많지만 국립진주박물관은 변화를 위해 더욱 고민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서부 경남의 박물관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복합문화기관으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그래, 이런 기특한(!)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박물관이 만들어졌구나. 이 박물관의 전시를 기획하고 구성한 학예사들의 안목과 수준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과거에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많이 뒤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를 미친듯이 돌아다닌 한국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우리 것에 적용하면서 우리 문화도 많이 세련되고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어느 교수님의 강의내용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진주박물관만 봐도 그렇다.
심화학습을 마치고 나오면 고졸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진주성 곳곳이 달리 보인다. 430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이곳은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의 피로 물든 곳이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은 외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한 곳이지만 적들이 사방을 둘러쌌을 때는 물러서고 도망갈 곳 없는 지독한 고립의 땅이다. 안전과 공포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장소. 남강변 절벽에 우뚝솟은 성벽 쪽으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쳐다보았다. 왜적들은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랐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다리를 밀어내고 뜨꺼운 물을 붓고 돌을 던지고 창으로 막아냈을 것이다. 뺏으려는 자도 지키려는 자도 그저 영문을 모른 채 살기 위해 죽고 죽여야했던 아비규환의 현장. 왜적도 조선 백성도 그 지긋지긋했을 공포스런 전쟁에서 살아남고 싶은 나약한 한 존재였을 뿐. 성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들의 절규를 남강은 다 듣고 있었겠지만 말없이 흐르기만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이 시끄러운데 수백년이 수천년이 흘러도 인간은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짓을 벌이지만 전쟁을 하자고 한 놈들은 자연사를 하고 죄없는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린다. 진주성에서 430년 전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우크라이나에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하며 촉석루를 스쳐 지나 진주성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