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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혼자 진주여행(2)

군대를 또 간다고?

by 오궁

아무리 좌석이 편해서 꿀잠을 자도 고속버스에서는 어느 시점에 되면 저절로 깨기 마련이다. 눈을 뜨니 산청께를 지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오니 차창 밖 도시 풍경은 어느새 시골의 봄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는 벌써 봄이 오기 시작했구나. 지리산 자락에 점처럼 자리잡은 마을은 예뻤고 들판의 무채색은 옅은 초록으로 시나브로 바뀌고 있었다. 버스는 진주 나들목을 빙글빙글 돌아 속도를 줄인 뒤 진주 터미널에 닿았다. 어떤 도시에서든 교통수단에서 내려 발을 딱 내딛는 순간이 제일 긴장된다. 우리나라지만 낯선 도시에서는 늘 그렇다. 잠시라도 친해지는 심호흡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때는 걷는 게 최고다. 첫 번째 목적지로 가는 버스 노선은 파악해 두었고 두어 정거장을 걷기로 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구법원까지는 1킬로미터 남짓.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양교를 건너 가면서 진주와 조금 더 친해졌다.


구법원 앞에서 361번 버스를 타면 진주시 금산면 속사리가 종점이다. 공군교육사령부 후문이 있는 곳이다. 사실 진주하고는 구면이다. 26년 전 1996년 3월 18일(진주를 방문한 날이 3월 19일이었다.)에 입대라는 것을 한 곳이 바로 진주였다. 진주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공교사 방문이다. 아들을 군대보낸 것도 아니면서(나는 다행히 딸만 둘이다.) 무슨 일로 거길 또 가냐 싶지만 그냥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대부분 군대를 다녀오면 복무한 군부대 방향으로 오줌도 안 누겠다며 군생활의 끔찍함을 이야기하지만 20년 넘게 지나면 나쁜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이고 오줌을 눌 때마다 방향을 신경 쓰기에는 세상의 화장실 방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군부대 방문,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입대한 훈련소 정문 앞에 내려 뒷걸음질 친 이야기에 공감해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적이고 이례적이며, 자칫 ‘쟤, 변태 아냐?’ 할 만하여 감히 일독을 청ㅇ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축구 이야기는 안 할 테니 멀리 가지 마시기를…



드라마에 벌어진 일이 마치 나의 일인 양 이입을 해서 울고 웃고 하는 것처럼, 종점 공군교육사령부 후문 정류장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이상해졌다. 전쟁이 나도 제발로 찾아가지 않는 이상 불러주지 않을 나이라 입소, 입대 이런 것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죽는 일만큼 나와 무관한 일인데도 기분이 묘했다. 아마도 입소하는 훈련병이 이 버스를 타고 간다면 점점 줄어드는 민간의 시간과 거리가 아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다큐든 드라마든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에 유달리 반응이 좋은 사람은 별 희한한 상황에도 감정이입을 한다. 늙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타고 난 성정이 그런 게지.


버스가 종점을 몇 정거장 앞두고 금산면 소재지를 지나는 데 옛날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이십 몇 년 사이 발전을 많이 했을 것이고 입대하는 자의 좌절 앞에 스쳐 지나가는 무슨 풍경이 눈에 들어와서 기억에 남았을까. 그래도 진주에서 유명하다는 산홍냉면의 위치만은 잊지 않고 점찍어 두었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다. 남은 승객은 나 하나.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군부대의 각잡힌 대문과 바리케이트, 실탄이 없는 총을 들고 있는 초병. 마치 입대를 하는 사람인양 20대 초반 어느 순간의 황망스러움과 어리바리함이 한 번에 떠올랐다. 버스는 나를 내려놓고 부대 안으로 쌩하고 사라졌지만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안다. 바로 옆에 있는 면회소에서 불러낼 사람도 없다.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나는 일. 슬금슬금 뒷걸음치듯 부대 후문이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이렇게 허무한 목적지라니.


카페 2층에 자리를 잡으니 부대 후문이 저멀리 보였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어지고 26년 전 10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던 그곳에서의 있었던 일이 조각처럼 떠올랐다. 3월 중순이었지만 신병교육을 받는 내내 너무 추웠다. 손은 다 텄고 목은 쉬어 건조한 날씨에 잔기침이 잦았다. 우리들 마음 속에 봄은 오지 않았지만 연병장 한 켠에 드문드문 자라고 있던 노란 민들레는 예뻤고 처연했다. 노래는 두 곡이 생각나는데 훈련받다 쉬는 시간에 덕규라는 친구가 부른 달팽이는 들을 때마다 모든 긴장이 잠시 멈춘 따뜻한 봄날의 햇볕과 그 샛노란 민들레를 떠올리게 한다. 1,600명이 모인 강당에서 몇몇이 나와서 장기자랑처럼 노래를 했는데 누군가가 부른 김정민의 슬픈 언약식은 여자친구가 있거나 없거나 모두가 흐느끼며 따라 불렀다. 웃픈 장관이었다. 군가는 기억이 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다. 빽이 좀 통하던 시절이라 아버지 친구분이 보낸 정중사가 몰래 불러내서 초코파이를 마음껏 먹으라며 매점에 데리고 갔는데 한 박스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두 개밖에 안 들어 가더라. 화장실에서도 먹을 수 있다는 놈들은 다 먹깨비더냐.


첫 면회에는 할매부터 막냇동생까지 가족들이 총출동 했는데 만들거나 농장에서 키웠거나 사서 싸 온 음식은 한 백 명 모인 잔칫상을 방불케 했다. 막내에게는 그렇게 못했다고 한다. (나는 먹느라 바빴고 고등학생 막내가) 한 시간을 넘게 공중전화 앞에서 기다렸다가 여자친구의 하숙집에 전화를 했는데 집에 없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인사행정 특기를 받고 몇 주간 배운 문서교육은 회사에 들어와서도 도움이 되더라. 군대도 가끔 그렇게 쓸모가 있다. 대체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녀온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특기교육을 받은 기술학교에서는 일과를 마치고 매점 앞에 줄을 빨리 서서 만두, 소시지 같은 인기 아이템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큰 일이었다. 어찌 하다 보니 매점 박상병에게 맨투맨 영어 과외를 해주게 된 나는 매점 문을 열기도 전에 핫한 음식들(그래봐야 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정크푸드였지만)을 매점매석하는 특권을 누려서 내무반 친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도 했다. 앞으로 27~8개월 정도의 군생활을 좌지우지할 자대배치를 받고 더플백(더블백이라고 불렀다.)을 메고 수원으로 갈 때는 설레기도 했지만 ‘다나까’가 필요 없이 동기들하고만 지내던 시절이 끝나서 아쉽기도 했다. 26년 전 일인데도 기억이 나는 건 젊어서 머리가 생생하게 돌아갈 때이기도 하고 그만큼 깊이 각인된 큰 충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축구 얘기를 안 했는데 훈련소 시절에는 축구를 안 했다.


내가 앉아 있던 카페에서는 부대 후문이 보인다. 군대 보낼 아들은 없지만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다 보니 군대를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에 저절로 이입이 된다. 아들을 군대에 들여보내고 나서 조금이라도 아들의 온기를 느껴보려고 멀리 가지 못하고 이곳에 앉아서 이미 아들은 사라지고 없는 후문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남일인데도 그렇게 마음이 쓰이더라. 우리 부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효자가 될 일은 없겠지만 26년전 부모님이 느꼈을 슬픔과 그 슬픔의 크기만큼 준비한 산더미같은 면회음식이 조금 이해되었다.

카페에서 나와 냉면집으로 가는데 저 멀리 보이는 건물들이 알고 보니 특기교육을 받던 곳이었다. 언덕길이며 건물의 모양새가 그러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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