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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혼자 김제여행(5)

글로 만든 산, 아리랑

by 오궁


김제로 나를 이끈 것은 두 가지였다. 지평선과 아리랑. 90년대 이전의 학번이라면 문학도가 아니라도 새내기 시절에 교양서적으로 꼭 읽어야 했던 태백산맥. 라떼는 말이야 태백산맥 안 읽은 사람은 지성인 대접을 받지 못했지. 그저 조정래는 등불 같은 작가였다. 역사책에서 배우지 못한 민중의 이야기를 핍진하게 펼쳐낸 그의 소설은 세상을 보는 새로 뜨게 해주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다 읽고 나면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개발독재 시대를 통찰할 수 있었다. 문학은 허구지만 현실에 발을 떼고 있을 수 없다.


20년 전쯤이었나. 남도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는데 동선도 잘 맞지 않았고 볼 것도 많이 없는 벌교를 굳이 넣은 건 순전히 태백산맥 때문이었다. 한강의 무대인 서울에는 지금 살고 있으니 김제만 다녀오면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의 주 무대는 다 가 본 셈이라 징게맹갱 여행의 의미가 더해지는 거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리랑을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자세한 스토리도 등장인물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일제시대, 곡창지대여서 더 수탈이 심했던 김제만경 지역 농민들의 신산한 삶을 따라가며 안타깝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정도만 남아 있다. 오기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12권이다.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은 벽골제 맞은편에 있다. 소박한 2층짜리 건물이다. 멋은 좀 없다. 설계비에 큰돈을 쓰지 않은 듯하다. 맞은편에 있는 한옥 중에 하나 옮겨 놓고 싶었다. 이런 문학관이 있다는 것으로도 감사해야지. 욕심이다. 입장료는 없다. 한 층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전시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제2전시실 ‘아리랑, 지구 세 바퀴'였다. 아리랑을 집필하기 위해 만든 집필 계획서부터 전 세계를 돌며 취재한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취재수첩의 분량과 세밀함이 엄청나다. 사진을 못 찍으면 직접 그려서 남겼다. 인터뷰 노트에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생활의 소소한 기록들은 물론이고 현지에서 쓰는 같은 듯 다른 용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적어도 소설 안에서는 전지전능해야 한다.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12권의 대하소설의 조물주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얼마나 철저하게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제2전시실이 보여주고 있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은 글로 남겨진 내용도 방대해서 압도적이. 그 압도적인 글을 쓰기 위해 취재한 내용은 비록 압축되고 잘려 나가 활자화되지 못했지만 아리랑 문학관에 남아 한 사람의 의지가 이룬 위대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 글 잘 쓰는데 나도 소설이나 한 번 써볼까 싶은 분들은 아리랑 문학관을 먼저 다녀가라고 권하고 싶다. 제4전시실에는 아들과 며느리, 독자들의 필사 원고가 전시되고 있다. 쌓아올린 원고의 높이가 어른 허리춤은 훌쩍 넘을 정도다. 조정래라는 거인이 쌓은 문학 아리랑의 산은 그렇게 높고 높았다.


지평선의 고장 김제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 세 가지 산을 만나고 돌아간다.

광막한 너른 들판에 사람들 모여 살라고 자연이 만들어 준 야트막하고 정겨운 우리의 이웃 산들.

그 산에 등대고 사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며 쌓아올린 벽골제와 신털미산.

그리고 그들의 고단했을 삶의 모습을 남김없이 기억하고 기록해서 이룩한 아리랑이라는 거대한 산.


산과 산과 산이 시공간과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이어진 이곳은 지평선이 끝없는 김제만경평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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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여행 시간표]

05:40 집에서 출발

06:38 영등포역 출발

10:00 김제역 도착

13:00 고각에서 점심

13:50 아리랑 문학관

14:20 벽골제

15:20 김제향교, 동헌

15:50 성산재 찻집

17:52 김제역 출발

20:13 용산역 도착

21:00 집에 도착

[여행 경비]

무궁화호 : 16,700원

KTX : 32,200원

짬뽕 : 13,000원

쌍화탕 : 7,000원

택시비 : 8,800원

합계 : 7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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