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든 산
원평천은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에서 동진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다. 그리고 그 강은 군산과 부안 사이에서 위에서 내려온 만경강을 만나 바다가 된다. 원평천의 제방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목적지인 벽골제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뚝방길로 올랐더니 평야는 조금 더 멀리 보였다. 얻어먹을 것 많은 잔칫집에 객이 모이듯 낙곡이 많은 평야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에는 청둥오리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해바라기를 하면서 몸을 데우다가도 먼 길 떠날 연습을 하는지 떼 지어 날아올랐다. 옷깃을 여밀 만큼 바람이 세게 불어도 새들은 유선형의 매끈한 몸매를 뽐내며 바람을 갈랐다. 어김없이 V자 대형을 유지하는 건, 자리 순서를 정하는 건 누구한테 배워서 그렇게 하는지 봐도 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원평천 뚝방길이 끝나고 다리 하나만 건너면 벽골제 관광단지다. 단조로운 풍경이었지만 무료하지 않게 걸었다. 갑자기 목줄 없는 개 세 마리가 짖는다. 자기들 집을 침범하려는 낯선 자에게 자비 없이 컹컹댄다. ‘얘들아, 나는 그냥 지나가는 과객이란다. 그러지 말거라.’를 뜻하는 눈빛을 그윽하게 보냈지만 여지없다. 뒷걸음을 치면서 멀어졌는데도 유독 한 녀석이 끝까지 따라와서 기세를 늦추지 않는다. 그쯤 되면 집주인이 “메리, 들어와~!” 할 법도 한데 집을 비웠는지 정말 개소리만 들판에 쩌렁쩌렁했다. 워낙 사납게 짖는 통에 물릴까 봐 살짝 걱정이 됐다. 조금 더 거리를 두자 더 따라오지는 않았는데 남의 동네 오니 개한테도 무시를 당하는구나 싶었다. 자나 깨나 개조심이다.
김제평야를 걷다 보면 재미있는 풍경이 하나 있는데 지평선이라고 해서 정말 끝 간 데 없는 직선일 것 같지만 중간중간에 뾰루지처럼 볼록하고 앙증맞게 솟아있는 언덕들이 보인다. 다른 데 가면 언덕 축에도 끼지 못할 애기들이 여기서는 산 행세를 한다. 너도 산이냐 싶지만 주변에 나보다 높은 데 있으면 산으로 쳐주마 하듯이 산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리고 집들은 그 산을 뒷배 삼아 자라잡아 마을을 이루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그 장관을 소설가 조정래는 아리랑에서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그들 세 사람은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을 걷기에 지쳐 있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 안에서도 김제·만경 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곳이었다.
눈길이 아스라해지고 숨길이 아득해지도록 넓은 그 벌판이 보기에 너무 지루하고 허허로울까 보아 조물주는 조화를 부린 것일까. 들녘 이곳저곳에 띄엄띄엄 야산들을 앉혀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야산이라는 것들은 경사가 그지없이 완만하고 몸피도 작아서 산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높직한 둔덕이라고나 해야 옳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솟은 것이라고는 없는 벌판에서는 그나마 산인 것을 뽐내고 그 체모도 갖추어야겠다는 듯 야산들은 어김없이 소나무를 키워내 산다운 치장을 하고 있었다. 넓기만 한 벌판에서 그런 야산들은 풍광으로서 그럴듯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그 야산들은 모둠모둠 마을들을 품고 있었다. 그 언제부터인가 벌판을 논으로 일구어 목숨줄을 이어온 사람들은 야산에 의지해 드센 바람을 막고 햇볕을 도탑게 받으면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터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리랑 제1부 아, 한반도 중 11~12쪽
이 동네의 산세(!)가 이러하니 산을 꼭 자연만 만들라는 법이 없었나 보다. 신털미산은 벽골제 바로 옆 원평천 하중도 하류 쪽에 있는 높이 15.9미터의 산이다. 16미터도 아니고 15.9미터라니 이런 솔직한 고백이 또 어디 있나. 20미터도 안 되는 높이로 산이라고 하는 것도 뻔뻔스럽지만 ‘그래, 나 16미터 안 돼.’라는 당당함은 김제니까 가능할 것이다. 그럼 나도 김제 온 김에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 170 안 된다.
이 귀여운 신털미산은 전설에 따르면 1415년 벽골제 제방 수리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해진 짚신을 버린 것이 쌓여 산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신을 털고 버려서 산을 만들었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서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서 만든 저 거대한 벽골제보다 외려 이 자그마한 신털미산에 눈길이 가는 건 그 속에 담겨있을 수많은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벽골제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곳이다. 지도에서 보면 신털미산은 벽골제 제방 끝에 살짝 떨어져 거대한 느낌표의 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벽골제 관광을 완성하는 곳이야말로 신털미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