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두려움의 공존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해가 열차 왼쪽 창 블라인드를 뚫고 직선으로 들어왔다. 오른쪽에 앉길 잘 했다. 기차표를 예약하면서 좌석을 선택할 때는 항상 상행선인지 하행선인지, 해가 뜨는 시간인지 지는 시간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따가운 햇살을 그대로 받느라 기차 여행의 묘미인 차창 밖 풍경 감상을 제대로 못할 수도 있다. 해가 뜨는 시간에 남쪽으로 가는 하행선 기차를 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때는 왼쪽이 해가 뜨는 동이고 서는 오른쪽이다. 당연히 오른쪽 자리를 골라야 한다. 해지는 시간에 상행선 기차를 탔다면? 이때도 오른쪽에 앉는 것이 좋다. 그리고 출입문에서 너무 가깝지 않은 곳을 고르는 것도 잊지 말자. 남들 다 아는 얘기도 이렇게 적어놓으면 그럴싸하다. 글이라는 게 그렇다.
산이 아주 저 멀리 보이거나 안 보일 정도로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전라도 땅으로 들어왔다. 휑한 벌판 위에 있는 덩그러니 얹혀 있는 김제역에 사람 몇몇을 내려놓고 기차는 유영하듯 제 갈 길을 계속 갔다. 천천히 작은 점이 되더니 지평선 위에서 잠시 깜빡거리다 사라졌다. 플랫폼에 내리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사일로였다. 벼를 가공하는 웅장한 공장은 직선 위에 대비가 되면서 더 도드라졌고 쌀의 고장에 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김제역 앞은 휑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어 휑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기차에서 내린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몇 대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어느 곳이든 역전앞(!)은 도시의 중심이기 마련이고 도시가 구도심 신도심으로 나누어져 기차역이 구도심에 남아 있어도 그 흔적은 남기 마련인데 김제역은 애당초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없었던 것 같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여정이 자유로워서 동선을 좀 느슨하게 짜는 편인데 목적지에 도착한 직후에 어디로 갈지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으면 살짝 당황스러워진다. 우선 김제역에서 걸어서 들판을 가로질러 벽골제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음에도 카페 하나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니 불안함이 밀려왔다. 이런 같지도 않은 위기 상황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나게 해준다.
이 낯선 도시와 친해지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아침을 시작하는 커피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데 효과가 있다. 커피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김제역을 중심으로 카페를 지도에서 검색했더니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곳에 카페가 있었다. 애초에 짜 놓은 동선에선 벗어나 있었지만 김제와도 친해지기 위해서라도 나쁘지 않았다. 10시부터 영업한다던 카페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곧장 주인이 달려올 것 같지도 않았다. 늦잠 자도 괜찮을 일요일이니까. 내가 쉬고 싶은 날은 다른 사람도 쉬어야 하니까. 다른 카페는 더 먼 데 있었고 변변한 편의점 하나 없는 곳이었다. 보람도 없이 김제역으로 돌아와 여정을 시작했다. 그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소득 없이 날린 30분은 좀 아까웠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곧장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김제평야다. 그래 이곳이 호남의 곡창지대라는 김제평야로구나. 그러고 보면 곡창지대라는 표현은 친근하고도 낯설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 것이다. 언뜻 보아도 저 너른 들은 논으로 시작해서 논으로 끝난다. 직선과 직선이 만나 논과 동리의 경계를 이루고 그 직선을 따라 크고 작은 물길이 빠짐없이 흐르고 있다. 평야의 광활함만큼 놀라운 것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수로였다. 수평 각도가 0일 것 같은 들판의 구석구석, 누구네 논 하나 빠짐없이 물이 들고 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농부들의 협력, 양보, 타협, 합의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사방 수십 킬로미터 안에 민가 하나 없어도 목말라 죽을 일은 없을 곳이다.
본격적으로 평야를 걷자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무채색의 겨울 논이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의 빨간, 파란 지붕이 아니었다면 고립감은 더 커질 판이었다. 주변에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빈 논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겨울철새 몇 마리 밖에 없다. 파란 하늘은 거의 완벽한 반구의 형상이었다. 어쩌면 낮보다 밤의 하늘이 더 멋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 것 없는 광야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데도 갇혀 있는 듯했다. 1차 목적지인 벽골제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따금씩 스마트폰의 지도를 열어 내 위치를 확인했다. 어떤 길로 가든 남서쪽이라는 방향만 정확하면 문제없다. 마을을 통과하는 길이든, 일자로 뻗은 큰 농로든, 수로 옆 둑길이든, 논두렁이든 마음이 내키고 발이 닿는 대로 걷는다. 마을 정미소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노인이, 남들보다 일찍 나와서 논에 퇴비를 뿌리던 농부가, 신자들을 실어 나르는 교회 버스 운전사가 힐끔 눈길을 준다. 경계와 신기함이 섞여 있는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