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2
주상절리길 안내판은 비교적 상세한 편이었다. 1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걷는 동안 대여섯 군데의 중요한 포인트들이 있었고 길이 난 사정에 따라 돌다리를 여러 번 건너야 한다. 머릿속 다 담을 수 없어 핸드폰을 꺼내 급하게 사진을 찍어 두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디서 건너야 할지는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는 굳이 필요 없긴 했지만 모르는 데서는 조금 과하다 싶은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신발끈을 단단히 조이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스스로 비장한 기운을 느꼈다. 어이 없지만 ‘나 좀 멋있나?’ 싶은 마음이 은근히 생겼다. 남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건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특별해졌다는 기분이 우쭐함까지 다다르면 남이 보기에 잘난 척이 된다. 그래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려고 이 글도 쓰고 있다. 그저 평범한 하천 같던 차탄천은 점점 깊어졌다. 일반적으로 계곡이 깊어지는 건 산이 높아져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평지는 가만히 있고 계곡만 깊어진다. 하천의 경계가 뚝방길에서 높다란 절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 출발했던 곳과 같은 높이였던 곳이 아득하고 아찔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용암이 지나간 길에 물이 파고 들고 파고 들어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물은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중력이 끄는 대로 집요하게 약한 곳을 노린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그림을 그리며 하천은 바다로 가는 길을 내며 흘러간다. 이따금 깎은 듯한 수직의 절벽이 나타났다. 육각형의 높은 기둥이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경이로왔지만 무섭진 않았다. 발에 밟히는 것이 화산석이었다. 제주도의 어느 하천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풍경이었다. 육지에서 화산석과 주상절리라니.
가끔 징검다리를 건넌다. 절벽 아래로는 길이 나 있지 않아서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징검다리라는 정겨운 이름에는 걸맞지 않은 큰 육면체 돌들이 제법 다리다운 모양으로 놓여 있다. 처음에는 경탄을 금할 수 없다가 징검다리, 주상절리, 협곡이 반복되는 다소 단조로운 풍경에 지루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상절리도 가로, 세로 모양이 따로 있는가 하면 색도 조금씩 다르다. 그 차이를 조금씩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군가 같이 걷는 사람이 있다면 ‘와 저것 좀 봐. 정말 죽이지 않냐. 아까 본 주상절리하고는 완전히 다르네. 여긴 정말 별천지구나.’ 하는 말들을 나누며 걸을 테지만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딱 한 명 본 주상절리길에서는 혼잣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무슨 길, 무슨 길 이름이 붙었다 하면 휠체어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흙 한 번 밟지 않을 정도로 나무 데크가 조성된 곳도 많다. 산 길에도 야자매트가 깔려 있다. 크록스 고무신발을 신어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곳도 많다. 그래도 소위 아웃도어 활동을 하겠다고 신은 고어텍스 등산화가 무색하지 않으려면 차탄천 주상절리길을 추천한다. 군청에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완성형이라면 코어텍스 신발을 신고 온 나는 대환영이다. 길 모양은 갖췄으나 곳곳에 풀들이 무성하고 그 풀들 사이로 지류에서 아무렇게나 내려온 물이 흥건하다. 신발의 방수기능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돌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길을 걸을 땐 내가 마치 탐험가가 된 것같은 기분이다. 길은 험하고 불친절하지만 성취감은 높아진다.
한껏 고양된 성취감을 주체할 수 없어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들고 간 묵직한 카메라로 풍경 사진만 한껏 찍다가 풍경 속의 나를 담아두기로 했다. 삼각대를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수공이 필요했다. 카메라를 바닥에 두고 렌즈를 들어 올려서 찍으면 각도가 엉망이라 좋은 사진이 나올 수가 없다. 최소한 상체 높이에 둘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눈을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징검다리 앞에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고 카메라를 놓았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멋지게 찍으면 될 터였다. 10초 타이머를 설정하고 달려갈 수도 있지만 그건 21세기를 살아가는 테크 싸비가 수만년 전 만들어진 자연의 신비를 여행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므로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연결했다. 스마트폰에서 카메라에 잡히는 화면을 확인하고 버튼을 누르는데 사진이 촬영되지 않는다. 아뿔싸!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버퍼링이 생긴 것처럼 카메라에 잡힌 나는 스마트폰 속에서 느릿하게 끊어지듯 움직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진 촬영에 성공. 그럴 싸한 사진 한 장을 건졌다. 사진만 보면 멋있어 보이지만 카메라를 놓고 화면을 확인하고 촬영하고 다시 카메라를 가지러 돌아가는 장면을 영상으로 본다면 꽤 우스운 모양일 것이다. 다행히 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영화 ‘돈룩업’ 마지막 장면을 보면 지구가 다 멸명하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 명이 셀카를 찍는다. 다 죽고 없는데 누구 보여주려고 그랬을까? 나는 그 사진이 나온 시점에 지구 최후의 생존자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긴다.
10킬로가 조금 안 되는 차탄천 주상절리길은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군데군데 도로를 깔고 시설을 짓느라 주상절리가 훼손된 흔적에 마음이 아팠다가 주상절리 위에 쑥 말리는 연천군민의 지질학적 스웩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깊고 높은 절벽이 언제쯤 끝날까 싶었는데 하늘이 넓어지고 주변이 조금 더 밝아지면서 차탄천은 어느덧 더 넓은 한탄강을 만난다. 삼형제 바위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서서 조금 더 가면 은대리성이 나타나는데 거기가 종착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