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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혼자 연천여행(4)

돌도끼, 세상을 만나다.

by 오궁

이름이 예쁜 은대리성은 토성의 흔적만 남아 있는 조용한 공간이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 천혜의 요새처럼 자리잡았다. 푸른 잔디밭 말고는 은대리성의 볼거리는 없는 편이다. 곧장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향했다. 연천군 보건의료원 주차장을 따라 큰길로 돌아 나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미 꽤 많은 시간을 걸어서 그런지 몸도 지치고 발도 아팠다. 아침부터 특별히 먹은 것도 없었다. 짧은 거리지만 교통수단의 힘을 빌릴까 고민했다. 여행을 할 때 버스를 탈까 택시를 부를까 하다가도 그냥 걷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수 킬로미터 정도는 걷는 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즐기게 되었다. 느린 속도는 풍경의 밀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은대성로를 따라 걷다 보면 쌍용아파트를 지나자마자 아주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공터가 나타나고 그 앞에 노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문화재구역 내 불법경작행위 금지 및 불법시설물 철거 행정명령" 문화재구역이었지만 발굴을 하지 않아 빈 터로 남아 있었고 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자기 땅처럼 경작을 했었나 보다. 이왕 하는 거 좀 깨끗하게 하면 좋았을 텐데 그곳은 농지도 아니고 거의 쓰레기장 겨우 면한 수준이었다. 문화재 구역과 시민의 삶의 공간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을 하면 좋을 테지만 곳곳에서 그렇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더 첨예해진다. 김포 장릉 주변 아파트 건설을 둘러싼 대립은 어느 한 쪽의 손을 쉽게 들어주기 어려운 형국이다. 그런데 나는 연천까지 와서 무슨 잡생각을 이리도 하는 것인가.


연천 전곡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1977년에 고고학을 전공한 그렉 보웬이라는 주한미군 상병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이상하게 생긴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돌이 바로 구석기 시대 아슐리안형 뗀석기인 돌도끼였다. 그 이후로 이 지역을 발굴해서 4,500여점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그 돌도끼를 발견한 곳을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이다. 돌도끼를 발견한 곳와 발굴 현장의 모습들 일부 보존한 공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발굴이 끝난 지역은 선사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어서 아이가 어린 가족들은 체험프로그램을 이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 주말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여기 빼고 다 가 본 것 같았다. 공원, 박물관, 체험관, 유적지, 캠핑장 등에서 아이들이 경험을 통해 세상을 더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부모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그 마음을 두 딸들을 아직은 모른다. 그 수많은 장소를 기억조차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무리다. 부모 기분 좋자고 한 일이라고 친다. 그게 마음 편하니까.


선사유적지 내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선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2011년에 개관했는데 국제 현상공모를 거쳐 프랑스의 건축가 니콜라스 데마지에르가 원시 생명체의 곡선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렉 보웬 상병이 도끼처럼 생긴 돌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보낸 곳이 프랑스이고 그 자리에 생기는 선사박물관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도 프랑스 사람이니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할지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닌 문화의 힘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반짝반짝 빛나는 외관과 선사라는 테마가 맞는가 싶지만 헛간처럼 지었어도 웃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은 생각보다 은근히 주변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 내부에는 아슐리안형 돌도끼를 비롯해 선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알프스에서 발견된 미이라 외찌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영상이었다. 박물관 2층 커다란 스크린에 계속 상영되는 영상은 5천년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외찌와 그가 갖고 있던 물건들을 통해 신석기인들의 삶을 유추해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3D로 정교하게 제작된 영상은 고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빠져들게끔 만들어졌다. 다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쉬는 동안 깊이 몰입하면서 관람했다. 연천 말고도 곳곳에 선사박물관이 있다는데 규모로는 여기가 최고라고 하고 더구나 무료니 근처를 지난다면 들르지 않을 수 없을 곳이다. 만약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더라면 아이들에게 그 영상을 강제(!) 관람 시키고 난 다음 영상의 내용을 퀴즈처럼 물어봤을 것이다. 내 새끼가 복습을 통해서 뭐라도 하나 더 배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랬을 것 같은데 결말은 분명히 짜증과 버럭이었을 테니 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사박물관에서 연천 여행은 끝이 났다. 다시 버스를 타고 향한 곳은 동두천역이 아니라 보산역이었다. 12시가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점심도 먹고 카페에서 여행기도 정리할 목적이었다. 보산역은 좀 특이한 곳인데 미군부대 캠프 케이시가 바로 앞에 있다. 그러다 보니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알 수 없는 거리 풍경이 펼쳐진다. 기지촌 특유의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다 보니 이태원보다 더 이국적이다. 2022년 같지도 않다. 보산역 아래에 길게 늘어선 월드푸드스트리트에서는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데 영업시간이 저녁부터라 아직 문을 연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케밥 맛집으로 유명한 하스케밥이었다. 그 동네에만 매장이 두 개 있을 정도로 이름난 곳이다. 내국인보다 외국인(대부분 미군이지만)이 많다 보니 주인장은 주문에서만큼은 영어가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도 영어로 주문했어야 하나 싶을 만큼. 양고기냐 닭고기냐를 고민하다가 둘 다 들어간 점보 케밥과 닥터 페퍼(왠지 이런 미국스러운(?) 음식을 먹을 때는 닥터 페퍼가 어울린다.)를 주문했다. 집에 싸가지고 싶을 만큼 흘륭했다. 혹시나 집에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단호하게 됐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우리집 여자들은 케밥같은 음식, 정확히 말하면 낯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1호선 전철을 다시 타고 빈손인 채로 집으로 향했다.


19억 년전의 바위부터 신생대 4기까지의 지질 활동이 쌓여 있고 구석기 인간 문명의 흔적이 돌도끼로 발견된 연천은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을 품고 있다. 우리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저 어쩌다 한 번 스쳐 지나갈 존재일 뿐이다.


일정

04:40 집에서 출발

05:10 영등포에서 전철 탑승

07:23 동두천역에서 버스 탑승

08:00 차탄천 주상절리길 트레킹

11:10 전곡선사유적지

12:30 보산역행 버스 탑승

13:00 보산역에서 점심식사(하스 케밥)

13:30 카페 스위트로빈

15:00 보산역에서 전철 탑승

17:30 집 도착


비용

대중교통 4,860원

점심 12,000원

커피 3,800원

합계 : 20,66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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