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아직은 그럴 때는 아닌 것 같다. 첫차를 타기 위해 5시가 되기 전에 벌떡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슬퍼해야 할지 새벽잠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청량리에서 6시 22분에 출발하는 강릉행 KTX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든 지하철이든 거의 첫차를 타야 한다. 아직은 어두운 시각에 사람 없는 버스를 타면 잠시나마 그 시간과 공간을 내가 독점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뿌듯하다. 뭐든 독점한다는 건 좋으니까.
기차에 오르자마자 출발도 하기 전에 곯아 떨어졌다. 잠든 순간에도 목이 이렇게 꺾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위태하다 싶었는데 목을 바로 잡느라 깨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가위도 눌렸다. 코는 골지 않았는지 잠꼬대는 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내 옆에 앉은 여성분도 나만큼 피곤했는지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1시간 반은 푹 자기에는 너무 짧아서 여기가 종점이 아니었으면 했다. 종착역 방송이 나오고 기차가 멈춰서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도 옆에 앉은 분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코를 곯았다고 해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뒤늦게 안심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강릉역은 처음이었다. 강릉에 가끔 온 일이 있지만 항상 운전을 했다. 가족들 집에 두고 혼자 올 때는 기차가 상수다. 강릉역은 번듯했다. 젊은 역사답게 깔끔했다. 아침 여덟 시는 도시가 깨어나기 이른 시각이다. 역사라고 예외는 없어서 문을 연 상점이 몇 되지 않았다. 차 없이 주로 걸어서 어떤 도시를 여행할 때는 갈 만한 곳이 제한적이다. 기차역이나 터미널에서 가까운 시내의 관광지를 볼 수밖에 없다. 첫번째 목적지인 강릉 대도호부관아를 지도에서 찍었다. 그간 강릉에 와도 바다로 바다로 나갈 생각만 했지 시내에 볼 거리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데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기차역에서는 30분 정도면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잠에서 겨우 깨어나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다보니 커피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더구나 여기는 커피의 도시 강릉 아닌가. 가는 길 중간에 언제고 내 정신을 번쩍 깨워줄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랜차이즈 말고 개성을 가진 멋들어진 카페 아무 데나 들어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청하면 커피도시의 바리스타는 여행자를 위해 최고의 커피를 내려줄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커피의 도시라도 바리스타가 8시에 출근하는 곳은 없었다. 출근길에 커피 한 잔 받아서 한 손에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그런 그림은 여기서 그려질 일이 아니었다. 토요일 아침 여덟시 반이라서. 강릉까지 가서 겨우(!)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먹는 커피의 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가는 길에 문을 연 스타벅스가 있었더라면 얼씨구나 하고 뛰어 들어갔을 것이다. 커피가 여행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매일 아침 먹던 커피를 마시지 못한 나는 퉁명하고 까칠해졌다. 그 감정을 쏟아 낼 상대가 없어서 다행이었다.그렇게 커피가 소중하면 집에서 나올 때 미리 한 잔 내려왔어야 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걸 이 나이에도 깨우치지 못했다.
국사시간에 공부를 열심했는지 안동대도호부가 더 입에 익은 강릉의 대도호부관아는 강릉 명주동 시내에 있다. 아홉시가 되기 전인데도 아침 운동 나온 동네 사람인지 나같은 관광객인지 구분이 어려운 사람들 몇이서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대도호부 관아에는 보물로 지정된 칠사당과 국보 51호인 임영관 삼문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칠사당은 단정하되 멋스러웠고 임영관 삼문은 웅장하지만 뽐내지 않았다. 그런 문화유산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언젠가 이곳을 지나갈 때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도시를 여러 번 다녀서 아는 것 같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아 다음 방문을 기약하게 된다.
경내를 돌아보는 데는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임영관 삼문을 지나 객사 쪽을 돌아보는 데 갑자기 아랫배에서 신호가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좀 많이 걸었다. 걷기 운동은 장 운동을 촉진한다. 변비인들아 걷자. 대호도부 관아에는 화장실이 두 군데 있다. 칠사당 근처에 하나 객사 근처에 하나. 나는 마침 객사 앞에 있었다. 그런데 마을과 가까운 객사 근처 화장실에는 휴지를 비치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휴지를 가져가는 사람들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읽고 싶은 대로 읽는 사람들 아니냐. 제발 저 말이 그냥 협박이길 바라며 문을 밀고 들어 갔으나 공원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깟 휴지 따위 정도를 훔치는 도둑을 평상시에는 귀엽다고 해 줄 수 있었으나 내 평화로운 배변을 방해한 그 누군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노와 원망은 원활한 배변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감정이어서 얼른 마음과 괄약근을 추슬렀다. 그리고 칠사당 쪽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고즈넉한 유적지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이 있다. 쳐다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무슨 별난 눈요깃거리냐 하겠지만 당사자는 평생 만날 일 없는 사람들 앞에서 이만큼 곤란한 일이 없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최대한 의젓하고 의연하게 걸었다. 비디오 판독까지 갈 필요없이 명백한 세이프! 커피가 먹고 싶으면 미리 준비할 일이고 속이 이상하다 싶으면 미루지 말 일이다.
평화로운 관람은 의운루로 이어졌다. 의운루는 구름에 기댄다는 뜻을 가진 누각이다. 구름에 기댈 만큼 높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그 높이가 말 그대로 적당해서 낮은 강릉 시내의 스카이라인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아찔하지는 않다. 누각의 지붕과 마루의 기둥이 만든 사각의 틀안에서 강릉시내는 얌전하고 예뻤다. 요즘 한참 뜨고 있는 명주동 거리라고 한다. 마루 위에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있었다. 쌀쌀했지만 견딜 만 했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있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내 이놈의 커피 꼭 맛있게 마시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