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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혼자 강릉여행(4)

커피에 미친 어떤 사람

by 오궁

누구 덕분에, 언제부터 강릉이 커피의 도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커피라도 강릉에서 만나면 더 다르게 느껴진다. 강릉엔 연고도 없고 친척도 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최근에 강릉에 가면 언제고 만날 수 있는 지인이 두 명 생겼다. 주씨 형제들이다. 어떤 지역에 찾아갈 수 있는 지인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주씨 M, B 형제는 강릉 교동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회사 동기로 친하게 지내는 또다른 주씨 H의 사촌 동생들이다. 강릉에 커피 하면 테라로사나 보헤미안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H가 주씨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를 소개해 주었다.


주가커피와의 만남은 드립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무렵 나는 핸드드립 커피에 관심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동네 카페에서 로스팅한 커피 말고 다른 커피에 목말라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그들의 스페셜티 원두를 택배로 배달해 먹기 시작했고 단골이 되었다. 속초로 떠난 작년 여름 휴가길에 부러 강릉에 들러 드디어 바리스타 주를 만났다. 젊은 바리스타 B는 어릴 때부터 커피로 진로를 정했다. 석사도 커피로 했고 강릉에서 열린 바리스타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나는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커피에 대한 열정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반해버렸다.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였지만 배울 점이 많아 존경하게 되었다. 그 후로 거의 열흘에 한 번씩 3종류의 커피를 추천받아 100그램씩 구독하듯이 커피를 강릉에서 공수한다. 핸드드립 한 잔에 20그램 정도 들어가니까 15잔이 나온다. 하루에 평균 1.5잔 정도 마시니까 대략 열흘이면 소진한다. 기계적으로 주문하는 편이지만 가끔 특이한 커피를 맛 보면 그와 커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훌륭한 전문가에게 조언을 받아서 좋고 그는 고객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서 좋다고 한다.


강릉까지 왔는데 주씨 형제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유이한 지인이니 일부러라도 찾아 올 인연인데. 남대천에서 교동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걷자면 조금 시간이 걸리고 택시 타긴 좀 아까운(소도시 여행에서 택시는 웬만하면 타지 않으려 한다.) 거리였다. 버스가 딱인데 강릉 시내 교통은 이미 마비수준이었다. 단오 축제 때문에 숙소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더니 시내에서 제 시간에 목적지를 가는 것은 하늘의 달따기쯤 되는 것 같았다. 늘 그렇듯이 여행의 후반부로 접어들면 발과 다리가 많이 아프다. 그래도 도리없다. 걷는 게 팔자려니 한다. 다시 대도호부 옆을 지나 주가커피에 도착했다. 미리 일러두지 않은 깜짝 방문이었다. 형제 중에 형인 M이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 싶은 B는 마침 그날 따라 대관령에 있는 다른 매장에 가 있다고 했다.

드디어 강릉커피 영접. 콜롬비아 리치피치라는 원두로 내린 아이스 커피는 특별하고 각별했다. 그래, 이것이 강릉커피지. 지친 몸을 이끌고 땀 뻘뻘 흘리며 마시는 스페셜티 커피 한 잔이 온 몸으로 퍼져 새벽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그 긴 여정을 위로해 주었다. 암, 여기가 커피의 도시지.


M이 사촌형인 H가 연휴를 맞아 서울서 내려와 있다고 일러주었다. H는 내가 강릉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빨리 와"

다짜고짜 카톡을 보냈다. 마침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 중이라며 친구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반가웠다. 매우 많이. 회사에서 가끔 보던 친구였지만 그의 고향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우리는 강릉에 대해서, 커피에 대해서, 주씨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회사생활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시덥잖은 말들을 주고 받았다. 카페란 그런 대화를 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그럴 뜻은 전혀 없었지만 마신 커피값과 마실 원두값은 친구가 대신 내주었다. 친구를 잘 두면 이런 좋은 일이 생긴다. 내가 H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친구는 가족들과의 약속이 남대천 단오장에서 있다며 K형의 촬영장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별로 변하지 않은 강릉거리를 함께 걸었다. 누군가의 기억의 흔적이 남은 곳을 주인공과 함께 걷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혼자 걸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작은 구멍가게에도 어떤 이의 과거가 살아 있었다. 교동거리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단오장에 도착할 무렵 K형이 전화를 걸었다. 촬영은 끝났고(소득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 거니까 차를 댄 곳으로 오라고 한다. 지방 촬영을 많이 다니는 형은 지역의 숨은 맛집들을 많이 알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축구장 근처에 있는 막국수집으로 갔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 조금 어수선했지만 막국수 맛은 좋았다. 막국수도 얻어 먹었다. 가끔 보면 난 잘 빌어먹는 팔자 같기도 하다.

서울 가는 기차 시간이 조금 남았다고 하니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동해에 숙소를 잡아서 바다를 실컷 볼 텐데도 그들은 굳이 바다로 향했다. 차를 댈 만한 해변을 찾아 올라가다 올라가다 연곡해수욕장 공터에 차를 댔다. 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해 유명해진 영진항의 등대가 보이는 곳이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흐린 저녁, 바다에는 해무가 가득했다. 현실감을 느끼기 힘든 몽환적인 시간대와 장소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형은 바닷가에서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태웠다.


“형, 제가 와서 그닥 도움드린 일이 없네요. 촬영하는 거 구경도 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손을 좀 보태려고 했는데…”

“아냐 우리 둘이 있으면 거의 말이 없는데 니가 와서 재밌게 얘기도 하고 좋았어.”

애초에 형은 내가 도울 일이 없을 걸 알고 있었고 말이 좀 많은 후배가 와서 무료한 그들의 일터에 작은 변주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얘기를 듣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다른 곳에 갈 때 불러주셔도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들과 내내 밀도 있는 대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평소보다 많은 말을 들은 셈이다. 이 정도면 서로가 윈윈이라고 할 만한 강릉에서의 만남이었다.


다시 차를 얻어타고 강릉역으로 향했고 그들과도 작별했고 강릉과도 인사를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H한테서 연락이 왔다.

“호근 잘 가고있나? 오늘 생각지도 못한 날에 생각지도 못한 친구를 만나 오래도록 생각날 시간을 만들었네~~. 조심히 올라가고..역시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건 사람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삶. 조심히 올라가~~^^”

“서울 거의 다 왔네.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만남에 강릉 여행이 더 즐거웠네. 혼자 하는 여행에 늘 사람이 비어 있었는데 그 자리를 채워줘서 감사. 내가 좋아하는 주가커피의 원두도 말할 수 없이 고맙네. 주가네 청년들이 그 자리에서 잘 버티고 있어줘서 더 고맙고. 내일 차가 많이 막힐 것 같은데 운전 조심하고...또 보세 친구.”

강릉여행의 주제가 뭐였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H가 다 정리해 주었다.


일정

04:45 집에서 출발

06:22 청량리에서 KTX 탑승

08:05 강릉 도착

08:40 강릉대도호부

09:40 강릉 단오제

12:30 단오마을에서 점심(김치찌개)

14:50 주가커피

18:00 황정숙 막국수에서 저녁(막국수)

19:00 연곡해변

20:30 강릉에서 KTX 탑승

23:30 집에 도착


비용

KTX 왕복 : 55,200원

커피 : 3,000원

택시 : 6,900원

음료 : 1,500원

합계 : 66,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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