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부터 강행군
옐로나이프 공항은 지방 소도시 버스터미널 같았다. 그래서 정겨웠다. 거대한 허브 국제공항이 주는 위압감은 전혀 없었다. 어서 와, 여기가 오로라의 도시 옐로나이프란다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 기내에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바깥으로 빨려 나갔다. 문을 나서자 작은 계단이 있었고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공항 직원의 안내가 들렸다.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영하 30도의 찬공기였다. 대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기도로 들어온 냉기는 기침을 불렀다. 살자면 숨을 다스려야 했다. 입속에서 잠시 공기를 데워 내려보내자 겨우 안정이 됐다. 숨 쉬는 것도 새로 익혀야 할 분위기였다. 기모가 달린 바지를 입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대합실로 들어가는 그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에 한기는 허벅지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어서 오라고 해서 어서 오긴 했으나 신고식은 호됐다. 블로그 사진에서 여러 번 본 백곰 한 마리가 뒷다리를 살짝 들고 수화물 찾는 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 옐로나이프 공항의 지킴이나 마찬가지인 백곰이었다. 모두들 그곳에서 사진을 한 장씩 찍는다. 광각으로 찍은 사진 속에서 보던 공항보다 실제가 훨씬 작아서 살짝 실망을 했다. 공항이 커서 뭐가 좋은지 나한테 좋은 점이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다.
단체로 여행을 온 일행 가운데 한 명은 밴쿠버 공항 입국심사에 걸려 미쳐 오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의 짐도 오지 못했다. 안타까워할 새도 없이 현지 가이드와 접선했다. 현지 가이드가 없으면 길 잃은 미아 신세가 되어 공항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할 것이다. 패키지여행을 왔기 때문에 가이드 없는 상황에 대한 대비는 전무했다. 가이드는 구세주였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버스에 실려 10분이면 닿는다는 호텔로 향했다. 과연 10분 만에 도착했지만 깜깜한 밤에 낯선 곳에서 버스를 타는 시간은 30분은 되는 것 같았다. 모두들 지쳐 있었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탔고 늦게 도착해서 마음을 졸이고 비행기를 잡아 타느라 달리고 고장 난 비행기에서 내려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느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첫날이니 만큼 오늘 하루 정도는 호텔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여행팀의 일정은 4박 6일이었고 4박은 곧 오로라를 감상할 수 있도록 주어진 날은 의미했다. 촬영팀은 비교적 여유 있는 7박 9일의 일정이지만 일반 여행객은 4박 6일. 딱 4일이었다. 도착 첫날이니 하루만 쉬자고 했다간 거금을 들여서 스무 시간을 달려온 보람이 깡그리 사라질지 모른다. 옐로나이프에서 사흘을 머물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이 95%라고 한다. 오늘만 오로라가 나오고 나머지 사흘 전체가 그 나머지 5%에 들어갈지는 아무로 모를 일이었다. 강행군을 할 여행객들은 15분 뒤인 밤 10시까지 오로라 빌리지가 제공한 방한복과 부츠를 갖춰서 호텔로비로 나와 달라는 안내가 떨어졌다. 15명의 여행객은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내일부터 있을 본격 촬영 회의를 위해 촬영팀은 남았다.
오로라 빌리지는 옐로나이프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30분을 차로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다. 오로라는 제대로 보자면 주위에 불빛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옐로나이프가 큰 도시는 아니지만 그 도시의 불빛을 피해 30분이나 탈출해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불빛의 위력이 새삼스러웠다. 30분을 버스로 달려 옐로나이프 시내를 벗어났는데도 옐로나이프 방향의 하늘에는 도시의 노란 불빛이 원반모양으로 구름에 반사되어 빛났다. 별빛은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유성우를 보기 위해 서울을 벗어나 60킬로미터나 떨어진 강화도의 한적한 시골을 찾아야 했던 서울 사람은 옐로나이프 시민에게 동질감을 잠시 느꼈다. 오로라가 가장 잘 보인다는 북위 62.5에 사는 그들도 제대로 된 오로라를 보자면 도시의 불빛을 등져야 한다는 것. 한국의 서울과 캐나다의 옐로나이프의 삶은 다른 듯 닮은 구석도 있었다. 눈 덮인 도로 위를 덜컹대는 버스는 망설임도 없이 신나게 달렸다. 언 도로 위에서 어떻게 될까 봐 버스를 처음 타는 사람들은 걱정이 되어서 손잡이를 꼭 잡고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불빛 하나 없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설국버스 안에서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외국만 나가면 친절해지고 상냥해지는 내 모습이라니. 어쨌든 선진국 캐나다의 기사 아저씨는 야근수당을 제대로 챙겨 받겠지만 밤늦게 고생이 많다.
오로라 빌리지에서 배정해 준 티피를 베이스캠프 삼는다. 오로라는 진하지도 눈에 띄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맛보기 수준으로 오로라를 잠시 관람한 셈이었다. 육안으로 보는 오로라는 흰색에 가까웠다. 하지만 구름과는 아주 미세하게 구분이 되었다. 첫날은 구름과 오로라를 구분하는 연습을 한 셈이었다. 첫날부터 오로라가 터졌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방송용으로도 극적이지 않았다. 이제 오로라를 볼 기회가 사흘 밖에 안 남은 일반 여행객들은 마음이 조금씩 불안했을 것이다. 오후 2시쯤이 되어서야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밤늦은 시각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 한국과의 시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