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8

비행기 타기 Personal Best

by 오궁

밴쿠버를 출발한 비행기는 순항에 순항을 더해 캘거리 공항에 도착했다. 옐로나이프 가는 비행기는 타는 데는 무리가 없을 시간이었다. 입국심사도 없었고 짐을 다시 부칠 필요도 없었다. 스타벅스에서 여유롭게 커피도 한 잔 했다.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싱거워서 다음번엔 꼭 샷 추가를 해야겠다고 했다. 싱겁거나 말거나 커피 한 잔은 육신과 정신이 지쳤다는 것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옐로나이프행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했다. 한국시간으로 몇 시인지 가늠할 새도 없이 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프로펠러 비행기의 낯선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자는 동안 하늘을 나는 느낌이 없었는데 눈을 떠보니 비행기가 활주로 위에 있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이륙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날개 쪽에 이상이 있어서 점검을 해야 한다고 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옐로나이프에 늦게 가는 것보다 도대체 안전하게 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래서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행기 지연 때문에 비행기 안에 앉은 백 명이 넘는 승객이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고 있다. 날은 추운데 이 겨울에 북위 62.5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닌지. 그게 그렇게 쉽게 허락될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인가? 정비사는 영하 20도의 혹한에서-그의 입장에서는 일상적인 겨울 날씨이겠지만-항공기 날개를 점검하고 있다. 별 것 아니라는 느낌인데 생각보다 쉽게 원인이 잡히지 않는 것 같다. 문득 항공사 규정이 궁금해졌다. 얼마 만에 못 고치면 그냥 비행기에서 내려야 하는지, 그다음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오늘 못 고친다고 판정을 내리는 일은 누가 하는지, 그 사람은 퇴근하지 않고 이 시간까지 공항에 남아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과연 지금쯤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만한 사람은 호출되었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어떤 시스템의 장애가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물론 나의 걱정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 말고는, 문제가 생겼고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의 두뇌활동은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다. 승객의 조바심과-아마도 대부분 한국 승객일 것 같지만-무관하게 기장과 승무원, 수시로 들락거리며 열린 문으로 기내에 냉기를 공급하는 정비사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그것이 직업적으로 단련돼서인지, 승객들 앞에서는 의연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훈련받아서 그런 것인지, 정말 별 일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나는 자꾸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생각 말고는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항공기의 안전에 관해서는 승객들도 잘 훈련된 선수들이나 마찬가지다. 비행기가 멈춰 서고 엔진마저 꺼져버린지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간간이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던지는 몇몇을 빼고는 다들 정지화면처럼 얌전하게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기내난동은 곧 망신과 처벌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기내난동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어떤 비난과 처벌을 받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선각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여행을 할 때 순조로운 일들은 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비정상적이고 이례적이고 고난을 극복한 무용담만이 찬란하게 빛나는 기억으로 남는다. 3박 5일간 파리,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던 신혼여행 때도 유명 관광지나 미술관의 명화들보다 더 오랜 기억으로 남은 건,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가 결항되었음에도 다른 비행기를 잘 잡아타고 한국으로 무사하게 돌아온 영웅서사였는데 그 이야기는 길이길이 남아 시시때때로 비행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양념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결국 신혼여행의 백미는 역경을 딛고 비행기를 잘 타고 온 것이 되었는데, 물론 그것은 그 역경을 딛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한 내 기억일 뿐이고 아내는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이 훨씬 더 좋았다고 한다. 역경과 극복의 서사는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이 일정이 늦어지더라도 무사하게 목적지에만 가 닿고 그다음으로 계획된 일들이 큰 차질 없이 풀린다면 오로라 투어의 양념은 캘거리 공항 비행기 정비사건이 될 것이고, 어쩌면 평창 동계올림픽을 즈음해서 역대 동계올림픽 이야기가 나와서 98년에 캘거리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것을 기억해 낸다면 ‘그때 말이야 내가 오로라 보러 가다가 캘거리를 경유했는데 말이야~’라며 운을 뗄 것이고 대화의 주제는 비행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특이한 경험으로 순식간에 넘어갔다가 찰나에 끝날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 내지는 책임자가 나타났나 보다.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두터운 방한복으로 중무장한 다음 형광빛의 연두색 조끼를 입은 정비사가 서너 번 정도는 들락거렸을까? 기다리던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기대는 이제 두 가지. 다 고쳤다고 할 것인가, 이번 비행은 글렀으니 다음을 기약하자고 할 것인가.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에어캐나다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 고쳤다고 해도 믿지 않을 준비가 된 승객들은 사실 다 고쳤다는 말을 뭔가 미심쩍은 비행기가 운행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태세였다. 그래서 차라리 내리라고 하는 편이 더 안심이 될 터였다. 다 내려야 한단다. 더 점검할 것이 있어서 전원을 껐다 켜야 한단다. 그렇게 큰 비행기도 고장 나면 껐다 켜는구나. 내 책상 위의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승객들은 일단 내려서 다시 탑승구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요지의 방송이었다. 안전과 관계된 방송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 거기다 기다리던 멘트 아닌가. 기장님께 감사, 용단을 내려주신 보이지 않는 책임자께 또 감사. 탑승을 하고 활주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엔진까지 정지한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차례대로 얌전하게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 봐 조심조심 비행기에서 내려서 탑승구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하루에 비행기는 네 번이나 타는 진기록이 작성되었다. Personal Best!


머지않아 다시 탑승이 시작되었다. 책임을 질 수 있는 당국은 빠른 판단을 내렸다. 다시 비행기 탑승구로 들어가는 기장과 승무원의 표정에도 여유가 넘쳤다. 그들에게는 일상다반사일 것이다. 탑승구에서 탑승권을 확인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녀는 탑승권을 확인하고 건네줄 때마다 Perfect, Excellent, Awesome, Thank you를 적절히 섞어가며 인사를 했다. 그 늦은 시각에 유쾌함을 잃지 않고 지루한 일과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만든 방식일 것이다. Awesome이나 Perfect말고 Fabulous를 달라고 했다. ‘빼~~~뷸러스’라는 말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그녀의 레퍼토리에 Fabulous가 추가되었기를 바란다. 지체되는 일정에도 유쾌함은 있었다. 아내와 함께 잠시 웃었다.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그것도 다른 비행기로 오늘 안에 간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혹시 아까 탔던 그 비행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깐 가졌지만 아까 막아놓았던 송풍구가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을 했다. 오로라가 이렇게 보기 힘든 것이라기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안전 앞에서는 이렇게 의심 많고 나약한 존재였다. 나만 그랬던 것일까? 제트엔진이 아닌 프로펠러 비행기는 생소하다. 그래서 미덥지 못했다. 저거 비행기 구실이나 제대로 할까 싶었다. 이륙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과 비행기를 바꿔서 탄 것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프로펠러 비행기에 대한 편견 없이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비행시간이 한 시간을 넘어가고 큰 흔들림 없이 순항을 하자 프로펠러 돌아가는 낯선 소리가 실은 제트엔진이 뿜는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안정을 찾았다. 곤히 잠든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안해하며 옆으로 파고들던 아내도 잠이 들었다. 잡은 손에 땀이 흥건했다. 비행기는 지도상에서 표시된 무인지대로 미끄러지듯 계속 날아가고 있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가도 가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넓다는 캐나다. 이 넓은 땅을 다 어디에 쓰나 싶다. 인구는 겨우 3천5백만이라니 면적을 인구수로 나누어서 세계 몇 등이라고 자랑한다 한들 그 면적이 다 무엇인가 싶었다. 저 아래 땅 가운데 사람의 발길이 한 번이라도 닿은 곳은 0.0000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캐나다인들은 인구당 국토면적 같은 것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좁은 땅에 살면 그런 것이 신기하고 부럽다. 기껏해야 내가 가진 공간은 30평 되는 아파트 한 채뿐이라서 그럴지도. 달빛에 비친 대지는 바다 위인지 호수 위인지 어쩌면 눈 덮인 땅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냥 하얗거나 하얬다. 비행기는 안정적인 소음을 내며 순항 고도를 날았다. 저 멀리 불빛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많아졌다. 거의 두 시간 만이었다. 조종사의 착륙실력은 훌륭했다. Awesome. 비행기의 작은 바퀴가 비로소 땅에 닿고서야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먼저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며 가장 크게 박수를 쳤을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무려 스무 시간 만이었다. 캐나다 옐로나이프가 아니라 칠레 남쪽 땅끝이라도 닿을 시간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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