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옐로나이프냐니?
지연 출발 했다고 4단 기어로 날던 비행기가 5단 기어를 넣고 속도를 더 내지는 않는다. 출발시간과 무관하게 비행시간은 정해져 있다. 더 느린 속도로 날거나 밴쿠버 상공에서 선회비행 같은 걸 하지 않은 비행기는 정해진 비행시간을 잘 지켜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캐나다 땅에 닿았을 뿐 옐로나이프까지는 두 번의 비행이 더 남아 있었다. 지연 출발 탓에 캘거리 가는 비행기 시간이 빠듯했다. 입국심사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런데 줄어드는 속도는 더 속이 탔다. 입국심사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약간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탑승구까지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데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국심사관은 내 사정과 무관하게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왜 왔니?"
“휴가 보내러 왔지."
"옐로나이프에는 왜 가는 건데?"
“왜 옐로나이프냐니? (아니 그걸 몰라) 오로라 보기 제일 좋은 장소니까. (너 캐나다 사람 맞냐?)"
“얼마나 있을 거니?"
“일주일."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예약했니?"
“(내가 여기 체류할 사람으로 보이냐) 당연하지."
“한국에서 뭐해서 먹고 사니?"
“은행 다닌다. (니 눈에도 내가 은행원처럼 보이지는 않는 게구나.)"
“옆에 있는 사람은 뭐 하니?"
“내 아내인데 가정주부다. (같이 불법체류 안 할 거라니까.)"
"응 알았어. 통과."
캐나다 정부 입장에서는 불법 체류자를 걸러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을 훌륭한 공무원일지는 몰라도 간단한 대답 몇 마디면 단체여행객은 통과되니까 걱정 말라는 여행사의 안내와 달리 그는 관대한 입국심사관이 아니었다. 왜 옐로나이프냐는 물음에 당황한 나는 아내 앞에서 진땀을 흘렸다. 평소 영어는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는데 그 녀석이 스타일을 제대로 구겨주었다. 식식거릴 새도 없이 캘거리행 비행기를 타는 탑승구를 향해 달렸고 우리 비행기가 늦게 도착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다행히 비행기는 지연되었다. 한 숨을 돌리면서 입국심사대에서의 굴욕(!)을 복기해 보았다.
우리나라 입국 심사대에 페루 남자와 그의 아내가 서 있다. 그의 한국 여행 최종 목적지는 경북 영양군이다.(옐로나이프 인구가 2만 명 정도 되는데 이와 비슷한 지자체가 경북 영양군, 인천시 옹진군, 전북 장수군 정도다.)
"한국에 왜 왔어?"
"휴가차."
"얼마나 있을 건데?"
"일주일."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예약 완료?"
"당연하지."
"그런데 영양군에는 왜 가?"
"(넌 그것도 모르냐?) 영양고추가 세계 최고라서 고추 축제에 놀러 간다."
"페루에서는 뭐 하냐?"
“(내가 고추축제 보러 가는 거 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회사원."
"잘 다녀 오셔. 통과."
페루 국민과 영양군민 모두에게 죄송하지만 밴쿠버 공항에서 겪은 건 대략 이런 상황이었을 거다. 캐나다의 허브와 같은 밴쿠버로 들어와서 전국 각지로 심지어 미국으로까지 흩어지는 수많은 외국인 가운데서 옐로나이프라는 곳을 찾는 외국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것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야 옐로나이프가 오로라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지만 그들에게는 북쪽 끝 사람도 살지 않는 춥디 추운 시골 도시일 뿐인 듯했다. 실제로 옐로나이프 시청 통계를 찾아보았더니 관광이 옐로나이프 소득에 기여하는 수준이 매우 낮았다. 옐로나이프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쓰고 가는 돈과 무관하게 이미 잘 살고 있었던 거다. 1인당 소득이 캐나다 달러로 6만 불이 넘는다. 그런 시골 도시를 간다고 하니 밴쿠버에 사는 백인 공무원 입국심사관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옐로나이프에서만 일주일 넘게 있을 거라니. 한국에 여행을 오는 여행자가 경주 한 번 안 가고 영양군에 고추 먹으러 간다는 게 잘 납득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엔 별 희한한 놈도 다 있다 싶었는데 사실 관계를 앞뒤로 맞춰보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오로라는 굳이 옐로나이프가 아니라도 북위 62도 근처의 아북극 지대라면 어디서든 관측할 수 있는 것이라 옐로나이프만의 특산물(!)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로라를 볼 남자로서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된 나는 이런 상황도 여행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새로운 상황을 즐길 준비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여행자의 첫 번째 덕목임을 가슴에 새기며 캘거리에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