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5

준비물의 명과 암

by 오궁

여행 일정이 정해졌다. 동행하는 일반 여행객은 4박 6일이지만, 제작진은 오로라를 못 볼 수도 있으니 7박 9일로 연장되었다. 여차하면 옐로나이프 명예시민도 될 수 있을 일정이었다. 제작진은 여행사와 연결해서 필요한 일들을 착착 진행해 주었다.

항공, 숙박, 일정과 같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작진과 협찬사가 알아서 진행을 해주니 항공권을 싸게 사거나 숙소의 위치를 알아보거나 할 일이 없었다. 그것도 여행 준비의 즐겁고 중요한 일부분이라 맡겨 두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나이가 한 두 살 먹어갈수록 그런 일은 누가 대신 해주는 게 좋아지게 되었다. 어디다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립심이 약해지고 있었다. 대신, 챙겨갈 준비물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행 일정 짜는 일에서 아낀 에너지는 준비물로 향했다.

나는 평소에 취미를 회사일만큼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야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즐길 수 있어야 삶의 밀도도 높아지고 부수적으로 노후 준비도 된다. 직장생활을 하는 시간보다 은퇴 후의 시간이 더 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준전문가 수준의 취미가 없으면 노후의 삶이 괴로울 수 있다. 갈 곳 없어 가는 산도 하루이틀이니까.

우선 준비물을 카메라, 통신과 전기, 의류, 세면도구, 주방용품, 기타로 구분하고 하나하나의 쓰임을 따져보았다.


카메라

소니 A7M2(메인), RX100M3(서브), SEL2820, SEL5518Z, SLIK 삼각대, 매직암, 릴리즈, 배터리, 라이트, 융, 방습제, 카메라가방, 메모리카드,

메인카메라 소니 A7M2 - 소니 미러리스 풀프레임 기종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카메라이다. 일생에 다시없을 오로라 사진을 찍자면 풀프레임 정도는 되어줘야 했다. 인생 사진을 남겨줄 것을 기대했다. 무겁고 덩치가 큰 만큼 배터리 소모도 빨랐다. 영하 40도에서.

서브 카메라 RX100M3 - 손에 쏙 들어가는 똑딱이계의 명기라 불릴 만한 기종인데 오로라 사진보다는 동영상과 간단한 스케치용 스냅사진용으로 준비했다.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똑딱이 만세!

SEL2820 렌즈 - 소니 카메라 E마운트에 끼우는 광각렌즈.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가져갔다. 권오철 작가님이 오로라 찍을 때는 화각이 넓을수록 좋다고 하는 말을 오로라 빌리지에서 첫날 바로 이해했다.

SEL5518Z - 요리사진이나 아이들 스냅사진 찍을 가장 애용하는 고가의 짜이즈 렌즈. 화각 때문에 꺼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들고 왔다. 오로라 사진에는 적합하지 않다. 다만 시내관광할 때 스냅사진용으로 좋지만 영하 30~40도의 추위에서는 바디와 렌즈의 사양보다는 기동성이 더 중요했다.

SLIK 삼각대 - 오로라 사진을 찍으려면 삼각대는 무조건 필수다. 밤하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최소 7초 정도에서 30초까지의 장노출이 필요한데 소위 손각대로는 어림도 없는 시간이다. 아무리 무거워도 이건 짐에서 빼면 안 된다. 눈으로만 보겠다면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매직암 - 한쪽엔 클램프, 반대쪽엔 카메라를 거치할 수 있는 제품인데 각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원래 창대한 계획은 삼각대에 메인 카메라 올려서 오로라 스틸 컷을 장노출로 찍고 서브 카메라를 매직암에 거치해서 삼각대에 고정해서 동영상을 찍는 것이었다. 음… 그건 전문가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훨씬 더 좋은 장비로.

릴리즈 - 삼각대와 함께 장노출 사진을 찍기 위한 필수품이다. 폰카 아닌 이상 웬만한 카메라는 셔터 스피드를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BULB로 맞춰놓고 릴리즈로 찍는 편이 훨씬 쉽다. 물론 릴리즈를 샀을 때는 인터벌 기능을 이용해서 타임랩스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랬을 리가. 그것도 고수들의 영역임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나온 오로라 사진과 별 사진은 대부분 릴리즈 덕분이다.

배터리 - 기온이 낮으면 배터리 소모의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고 한다. 그에 대비해서 여분의 배터리 역시 필수. 각 카메라마다 총 3개의 배터리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기온도 배터리 소모의 속도도 상상을 초월했다. 배터리가 빨리 소모되는 바람에 못 찍은 사진도 많았다. 대기 상태에서는 카메라에서 빼내서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보관해야 한다. 점퍼 주머니 안도 최소한 영상은 아니다.

스트로보 - 혹시나 밤에 플래시를 쓸 일이 있을까 싶어 챙겼는데 번쩍하면서 찍을 일은 없었고 다만 장노출로 오로라 사진을 찍을 때 사람도 같이 찍고 싶을 땐 핸드폰에 붙어 있는 조명으로도 충분했다.

융과 방습제 - 영하 30~40도에 노출된 카메라를 실내로 그대로 갖고 들어오면 순식간에 습기가 방울방울 맺힌다. 이 습기는 카메라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한가득이다. 이 카메라를 다시 들고나가면 그대로 얼어버려서 카메라를 못 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실제로 그렇다. 한 번 밖에 나갔던 카메라는 방습제를 넣고 융으로 싸서 가방에 넣고 다음날 아침까지 꺼내면 안 된다.

카메라가방 - 오로라를 보러 나갈 때 여러 가지 준비물을 챙겨 넣은 백팩도 필요하지만 카메라와 부속품이 여러 개라면 전용 가방이 있으면 좋다.

메모리카드 - 마음은 수 천장의 사진을 찍을 태세였다. 기본 메모리 64기가, 32기가에 16기가를 하나 더 챙겨갔다. 그래도 여분을 하나 더 챙겨 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극한의 추위에서 메인 카메라가 오작동하면서 메모리도 같이 먹통이 되었다. 다행히 파일을 읽는 것은 가능해서 찍은 사진을 날리지는 않았다.


통신과 전기

노트북, 110 볼트 콘센트, 충전기, 핸드폰, 현지유심, 110 볼트 어댑터, 멀티탭, 헤드폰, 이어폰

노트북 - 노트북은 여러 가지 용도였다. 글도 쓰고, 호텔에서 와이파이가 된다니 인터넷도 하고, 무엇보다 사진과 동영상을 그날그날 백업하는 용도로 준비했다. 비행기에서 폼나게 글을 쓸까 싶어서 들고 탔는데 좀이 쑤셔서 그리하지 못했고 어깨근육만 단련하는 용도였다.

110 볼트 콘센트 - 해외여행용 다목적 콘센트를 수년 전에 샀다. 아내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고 두길 잘했다. 캐나다는 110 볼트를 이용한다.

충전기 - 충전기는 다다익선이다. 당장 충전이 필요한 제품이 아내와 나의 핸드폰, 카메라 2대, 여분의 배터리가 있었다. 3개를 들고 갔는데 조금 모자라는 감이 있었다.

핸드폰 - 이건 뭐 준비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필수품. 핸드폰으로 오로라 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 않지만 가능은 하다. 최신 기종 핸드폰은 밝은 오로라가 뜰 때는 제법 괜찮은 사진이 찍혔다.

현지유심 - 오로라를 보러 간 사람이 한국에 연락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과연 아이들하고 가끔 통화하는 것 말고는 딱히 그 용도로 유심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지에서 일행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저렴한 데이터 플랜을 사서 갔다. 로밍보다는 저렴했다.

멀티탭 - 이 물품은 제법 유용했다. 배터리 충전 하느라 몇 개씩 꽂아 두어야 하는데 멀티탭이 없으면 곤란하다. 장비를 많이 챙겨갔다면 멀티탭 하나 정도는 챙겨도 좋다.

헤드폰, 이어폰 - 비행기 탔을 때, 공항에서 대기할 때 조금 유용했는데, 아내와 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정작 현지에서는 별로 필요한 줄을 몰랐다.


의류

구스다운, 기모바지, 폴라플리스 재킷, 내복, 넥워머, 핫팩, 장갑, 수면양말, 방한신발, 모자, 비니, 손수건, 선글라스, 잠옷

구스다운 - 촌스럽게도(!) 해외여행을 간다고, 그것도 멀리 추운 지방으로 간다고 멀쩡한 덕다운을 두고 구스 다운을 하나 샀다. 아내도 함께 한 벌 장만했다. 쇼핑도 여행 준비의 일종이라고 했다. 하지만 옐로나이프의 겨울밤 공기를 이기는 옷은 따로 있었다. 오로라 빌리지에서 어깨가 처질 정도로 무거운 캐나다 구스다운을 빌려준다.

기모바지 - 따뜻한 바지도 필요할 것 같아 준비했다. 잘 구하기도 쉽지 않은 기모가 안감으로 들어간 청바지는 두 벌이나 가지고 갔다. 갈 때 올 때만 입었다. 오히려 영등포시장에서 2만 원 주고 산 작업복 누빔바지가 더 쓸모 있었다.

폴라플리스 재킷 - 추울 때는 옷을 여러 벌 겹쳐 입는 것이 좋다. 폴라플리스 재킷은 구스다운을 입을 때나 잠시 벗어둘 때나 매우 유용했다.

내복 - 내복은 속옷과 한 세트. 하지만 발열 기능을 주장하는 제품도 우리나라에서는 열을 낼 뿐이다.

넥워머 - 목덜미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품목. 모자로도 이용할 수 있어서 더 좋다.

핫팩 - 핫팩은 일반용, 옷에 부착하는 것, 발에 부착할 수 있는 것으로 챙겼다. 혹시라도 부족할까 싶어 넉넉하게 챙겼다. 하지만 핫팩도 영하 20도에서는 얼어 버린다. 미리 열을 내서 갖고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발에 붙이는 핫팩도 밖에 오래 서 있으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를 데우는(!) 데 가끔 유용하기도 했다.

장갑 - 장갑은 두꺼운 스키용 장갑과 카메라를 작동하기에 편한 비교적 얇은 장갑, 두 종류를 준비했다. 오로라 빌리지에서는 장갑도 빌려주는데 그 벙어리장갑마저도 완벽하진 않다. 그만큼 춥다.

수면양말 - 양말을 겹쳐 신은 기억이 언제인가 싶다. 수면양말이 없었으면 동상 걸릴 뻔했다.

방한신발 - 방한 부츠를 살까 하다가 조금 두툼한 워커를 하나 샀는데, 방한부츠 역시 오로라 빌리지에서 빌려준다. 이걸 신지 않으면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다. 새로 산 신발은 비행기 탈 때만 신었다.

모자 - 머리가 별로 없는 나는 모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없으면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비니 - 비니는 캐나다 가서 멋진 걸로 하나 사려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결국 사지는 못했다. 넥워머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빌리지에서도 기념품이라며 후드 마스크를 주긴 했다.

후드마스크 - 영하 40도의 날씨에는 눈만 내놓고 있어야 했다. 도둑마스크라는 망측스러운 이름을 가진 후드마스크를 사가길 잘했다. 다녀온 뒤로는 쓸 일이 많지 않았다. 스키장 가야겠다.

손수건 - 땀이 많은 나는 손수건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북구의 겨울에도 의외로 손수건 쓸 일이 있더라.

선글라스 - 온통 눈으로 덮인 곳에서는 햇볕보다는 눈 때문에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가 필요할 것 같았다. 옐로나이프의 해는 10시에 떠서 3시에 진다. 옆으로 스쳤다가 지나간다.

잠옷 - 호텔에서 잠을 자니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보송보송한 잠옷을 입고 잘 줄 알았다. 밤 9시에 오로라 빌리지로 출근해서 새벽 2~3시에 퇴근해서 들어오면 그런 생각이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세면도구 종류는 칫솔, 면도기, 로션, 핸드크림, 립밤 등을 챙겨갔다.


그 외

책, 노트, 필기구, PP카드, CAD 1,100 환전

책 - 칼 세이건의 The Pale Blue Dot과 소설책을 한 권 챙겨갔다. 우주의 자연 현상을 보자면 칼 세이건의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건방을 떨었다가 10 페이지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비행기 타는 시간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피곤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와 대부분 함께 있다 보니 책 읽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 재미있고 짧은 책을 한 권만 들고 가라는 해외여행 고수 친구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 결국 그 책은 여행을 다녀와서 두 달 만에 다 읽었다.

노트와 필기구 - 노트북을 들고 가긴 했지만 글을 쓸 때는 정작 노트북보다는 노트와 볼펜이 훨씬 더 유용했다. 그때그때의 느낌을 순발력 있게 적어둘 수 있어서 이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Priority Pass 카드 - 전 세계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PP카드. 출국하는 인천 공항과 환승하는 밴쿠버 공항에서 두 번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인천에서 한 번 밖에 쓰지 못했다. 아직까진 공항 구경이 즐거운 나는 라운지에서 즐길 시간이 없었다.

캐나다 달러 현금 - 혹시나 해서 제법 많은 돈을 환전했다. 신용카드가 너무도 잘 통용되는 캐나다에서 현금은 10%도 쓰지 못했다.


주방용품

칼 2개, 도마, 간장,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후추와 그라인더

주방칼 2개 - 요리를 하는 중년의 남자로 출연하게 되었기 때문에 제작진으로부터 현지에서 요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곳에 가서 요리할 때 제일 불편한 것이 칼이라서 평소 주방에서 쓰던 칼과 칼갈이를 여행용 가방에 고이 모셨다.

도마 - 호텔방에 주방이 있고 웬만한 주방기구는 다 있다고 한다. 칼만큼 중요한 것이 도마라서 역시집에서 쓰던 실리콘 도마를 챙겼다.

간장,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 나는 외국에서 가서도 한국음식을 잘 찾지 않는 편인데 그래도 혹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식을 만들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장은 따로 준비했다. 옐로나이프 같은 작은 도시에 한식재료를 팔 리 없었다.

후추와 페퍼밀 - 페퍼밀은 후추를 필요할 때 갈아서 쓸 수 있고 요리에 멋을 낼 수도 있고 요리하는 사람도 멋을 낼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다.


그렇게 해서 준비물은 차고 넘쳤다. 가득가득 채워진 큰 가방은 13년 만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부부 티를 내는 데 충분했다. 이렇게 수많은 준비물을 챙겼는데도 빠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콘택트렌즈였다. 강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가 필수인데 이걸 쓰면 고약하게도 입김이 그래도 안경에 붙어 버린다. 거기서 끝나면 좋지만 매서운 추위는 안경에 서린 김을 단숨에 얼리고야 만다. 잘 증발되지 않아서 곤란하기 짝이 없다. 특히 한밤에 오로라 사진을 찍을 때는 콘택트렌즈 생각이 간절했다. 여행 안내서에서 콘택트렌즈를 챙기면 좋다는 글을 본 것 같긴 했다. ‘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하면서 무시한 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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