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날씨가 포근하겠습니다. 영하 20도.
나는 더위도 잘 타지만 추위라면 질색을 한다. 추위에 강한 세 여자(아내와 두 딸)와 함께 사느라 겨울만 되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8도로 쾌적하게 유지되는 집 안에서도 춥다고 오리털 내피 점퍼를 입고 산다. 집안의 외풍도 못 견디는 사람이 한 겨울에 오로라를 보러 나섰다니 이건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옐로나이프의 겨울 기온이 영하 수십 도라고 해도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막상 추위를 겪고 보니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추위를 유달리 많이 타는 사람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추워도 너무 추웠다. ‘추워, 추워, 추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어떤 단어를 생각 없이 계속 내뱉다 보면 그 말의 소리와 뜻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는데 ‘추’ 자와 ‘워’ 자로 이루어진 이 말이 여러 번 그랬다. 이 추운 지역 인구의 평균 연령은 캐나다 전체보다 두어 살 낮은 32세 정도인데 추위 때문이라고 들었다. 젊은이들은 춥지만 일자리를 찾아서 올라오고 나이 드신 분들은 추워서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간단다. 평균 연령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데다 추위까지 잘 타는 나는 아무래도 옐로나이프 체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도 훨씬 많아 보이고 훨씬 더 더운 나라에서 온 택시기사를 만나고서 마음을 살짝 고쳐먹었다.
"어디 가세요?”
"다운타운이요.”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기사님은요?”
"수단에서 왔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이요? 그 더운 곳에서?”
"네.”
"더운 데 살던 분이 여기서 살 수 있어요?”
"우리나라보다 여기가 살기가 낫습니다.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는데, 더울 땐 아무리 벗어도 답이 없어요. 그리고 살다 보니 적응이 됩니다.”
"듣고 보니 말이 되네요.”
눈과 얼음에 대한 로망 때문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북위 10도에 있는 모국을 떠나 무려 50도만큼 거슬로 올라왔을 택시기사는 얼음 언 호수 위로 차가 달리는 사진을 보며 신기해한다는 수단에 계신 어머니 이야기를 유쾌하게 하면서 꽁꽁 언 도로 위를 잘도 달렸다. 그러고 보니 겨우내 기온이 도무지 영상으로 올라갈 기미가 없는 옐로나이프의 도로는 늘 얼어 있었다. 딱 봐도 시속 2~30킬로미터 밖에 내지 못할 것 같은 도로에서 누구 하나 거침없이 달리고 망설임 없이 정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 노면 상태 정도라면 시속 100킬로미터도 문제없다고 할 기세였다. 차에 탄 사람의 불안과는 무관하게 버스 기사도 택시 기사도 언 도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숙달된 운전자들, 뛰어난 스노 타이어의 성능, 믿음직한 주정부의 도로관리 능력이 삼박자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이방인은 생각했다.
하여간 그래서 얼마나 춥냐면 입김은 속눈썹과 눈썹에 달라붙어서 하얀색 마스카라가 될 정도다. 공기와 닿은 살갗은 모조리 순식간에 찌릿찌릿해진다. 핫팩도 따뜻한 데서 미리 열을 내놓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핫팩이 얼어버린다니까. 영하 40도 언저리 되는 날씨에 오로라 빌리지에서 아이스쇼라는 것을 했는데 티셔츠에 물을 적셔서 공중에서 열 번을 돌리니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두부로 나무에 못 안 박아 봤으면 말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 대형마트 주차장에는 시동을 끄지 않은 차들이 많았는데 도난보다는 배터리 방전에 대한 걱정이 커서 그런 듯했다. 거의 대부분의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 앞에 전기 코드가 귀엽게 나와 있었는데 무슨 용도인가 했더니 배터리를 데우는 장치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대형마트 벽에 머리를 대고 플러그를 꽂고 있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은 여행안내서에도 잘 나오지 않는 옐로나이프의 명물이었다. 혹시나 렌터카를 빌려서 아내와 단둘이 드라이브를 해볼 생각으로 국제면허증을 만들어서 갔는데 인적이 드문 도로 위에서 시동도 못 걸고 조난당할까 봐 겁이 나 얼른 거두어들였다.
영하 40도 정도를 겪은 밤의 다음 날엔 영하 20 정도로 기온이 아주 많이 올라갔다. 추위도 상대적인 느낌인지 영하 20도라는데도 제법 포근하게 느껴졌다. 중무장한 내 옷차림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고 아내에게 큰소리쳤다. 한국에서 영하 5도 정도 날씨에서는 반팔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겠다고. ‘과연 네가?"라는 듯한 표정만 되돌아왔다.
추위 때문에 가장 아쉬운 것은 사진이었다. 예쁜 풍경을 담고자 했으면 기회가 많았다.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수 위에 떠 있는 수상가옥, 눈 덮인 호수 위의 끝없는 지평선, 스프러스 나무가 끝이 없이 펼쳐진 하얀 동토, 신비로운 자작나무숲, 소박하고 이국적인 옐로나이프 거리, 세월의 흔적이 멋스럽게 남아 있는 올드타운의 건물들. 이런 장면들을 멋있게 렌즈에 담고 싶었다. 성능 좋은 풀프레임 미러리스 카메라로 제대로 한 번 찍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영하 20도 정도를 포근하다고 느낄 정도의 날씨에서는 카메라를 꺼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후회할 거라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나는 사진에 공을 들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추웠고 추웠다. 정말 춥다니까. 다만, 사진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이나 애정이 없다는 것은 제대로 확인했다. 아마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위도 잊고 언 손으로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을 것이다. 제대로 건진 사진 몇 장 없는 건 사진에 대한 수련을 더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딘 아니 버틸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것도 경험이랍시고 인천공항에 들어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영하 2~3도 정도였으니까. 출국장을 나와서 문을 여는 순간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엇, 추워!” 그 몸이 어딜 가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