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23

오로라 보러 온 사람들

by 오궁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오로라를 봤으면 한다.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댕겼겠지만 그 이전에도 오로라 보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넣어 놓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꿈 치고는 제법 근사하니까. ‘그 정도는 돼야 버킷리스트이지’ 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이다. 아내와 나도 막연하게 죽기 전에 한 번은 오로라를 보러 갈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따라서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꿈을 꾸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 시간과 돈이라는 제한적인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자면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그에 따라 우선순위를 세우다 보면 사실 오로라 여행은 비행기도 여러 번 타야 하고 돈도 많이 드는데 오로지 오로라만 봐야 하는 여행이다. 기회비용만 놓고 주판알을 퉁겨 본다면 유럽을 가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아마 다큐멘터리 출연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면 같은 시간과 돈이 주어졌을 때 아내와 나는 주저 없이 음식의 천국 이탈리아행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로라를 보러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졌다. 오로라를 통해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계 여행을 너무 많이 해서 신기한 것을 찾다 찾다 오로라까지 오게 되었을까? 우연히 오로라에 꽂혀서 오로라를 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이벤트였을까? 그냥 어쩌다 보니 오게 되었을까? 만만치 않은 비용에 단체 여행 기간은 4박 6일. 오로라는 밤에 봐야 하니 6일보다는 4박에 훨씬 더 큰 방점이 찍히는 여행. 사흘 동안 머물면 오로라를 볼 확률이 95%라지만 나흘 내내 구름이 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옐로나이프의 하늘 아래로 부른 오로라는 그들에게는 무엇이었을까?


오로라 단체 여행객의 동선은 뻔하다. 낮에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밤에는 통근버스를 타고 오로라 빌리지로 향한다. 4박 6일 내내 거의 붙어 지내는 형국이다. 자연스레 친해진다. 구름처럼 떠 있는 오로라가 첫날에는 신기하다가 웬만큼 크고 센 오로라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 주로 티피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다가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릴 때만 바깥나들이를 할 정도의 요령이 붙는다. 오로라 빌리지의 다양한 밤풍경을 사진으로 남길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전략인데 그걸 모르고 밖에서 줄창 기다리다 보면 동태가 되기 쉽다. 티피 안에서 가만히 있으면 딱히 할 일이 없다. 결국 같이 온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오로라라는 공통 주제로 이야기가 옮겨 가기도 했다.


9살 아들과 함께 온 영화제 기획자, 의사, NGO 직원, 회사원, 게임개발자 등등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운명공동체는 적어도 4박 6일 동안만큼은 견고해 보였다. 알고 보면 우리의 평범한 이웃인 오로라 여행자들은 돈이 차고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고 시간이 남아도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오로라 하나를 보기 위해 알뜰하게 돈을 모으고 어렵게 휴가를 내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보통의 그들이었지만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꿈꾸는 순수했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많은 것을 감수할 정도로 열정과 실행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오로라와 그 오로라를 통해 꿈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던 그들의 눈빛은 어떤 별빛보다 밝았다. 누군지도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동지의식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S는 긍정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는 낙천적이고 쾌활했다. 그녀는 밴쿠버 입국심사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억류(!)되어 연결 편을 놓쳤고, 결국 밴쿠버에서 1박을 해야 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4번의 밤 가운데 하루를 밴쿠버 공항 근처 호텔에서 보내느라 25%의 기회를 놓쳤어도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행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런 예상치 못한 과정도 여행의 일부며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했다. 그녀가 한국에서 보낸 가방이 두 개였는데 옷가방은 옐로나이프를 떠날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먹을 것을 싼 가방은 이틀 뒤에야 도착했다. 카메라며, 옷이며 여러 가지 준비물이 들어 있던 가방을 받지 못해서 제대로 여행도 못했을 텐데도 그녀는 태연했다. 내가 보기엔 일행 중에 사진도 가장 열심히 찍고 체험도 가장 열심히 한 사람은 그녀였다. 뭐든 제대로 준비해서 갖추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나와는 다른 그녀가 멋있어 보였다.


작은 딸 민서와 나이가 같은 9세 어린이 B는 아빠와 단둘이 왔다. 딸만 둘인 나는 은근히 B의 아빠가 부러웠다. 아들을 데리고 오로라를 보러 온 아빠도 그 아빠를 따라나선 B도 멋있어 보였다. 오로라를 보는 일정은 어른이 소화하기에도 만만치가 않다. 그럼에도 B는 지루하다고, 춥다고, 배고프다고, 졸리다고 칭얼대지 않았다. 그쯤 되면 아빠도 선뜻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나설 수도 있겠다 싶었다. 9세 어린이의 눈에는 오로라가 어떻게 보였을까? 아빠의 기대와 달리 춤추는 오로라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아빠와 함께 한 소중한 시간들을 평생 잊지 못하지 않을까.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 오로라를 잊고 지내던 그가 어른이 되어 문득 오로라 여행자가 되었을 때는 그 누구보다 깊이 오로라의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내 아들은 아니지만 9세 B가 꿈을 꾸는 아이로 잘 자라기를 바란다.

촬영팀을 사흘을 더 머물러야 했고 일반 여행객들은 4박 6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떠났다. 그렇게 그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했지만 살다 보면 언젠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나의 옐로나이프 오로라 동창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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