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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우지렁이 Aug 03. 2024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의 안 좋은 예

['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200만 원 인생 (3/4)

대학 마지막 학기의 초입.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제라도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할 시간.


대부분의 문과 학생들이 성적에 맞춰 대학 진학을 하듯, 학과에 관련된 일을 진로로 잡으면 진로는 금방 정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 학과를 졸업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기껏 해봐야 '경리' 정도?


전공을 살릴 수도, 살릴 이유도 없고 살리고 싶지도 않다. 앞으로 일은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심지어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내가 잘하고 좋아할 만한 일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봐도 딱 하나밖에 없다.


'연구'.


당연한 일이다. 해본 것이 독학뿐이니 연구가 좋았다. 그나마 잘하는 것이었다. 아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문과 중에 연구를 업으로 하는 직업은?


'교수'. (당시 연구원은 모두 이과 사람들인 줄 알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 돈이 발목을 잡았다. 대학만 졸업해도 바로 교수가 되어 돈을 벌 수 있나?


'아니오.'


나는 당장 돈벌이가 필요하다. 교수가 되려면 일단 대학원을 가야 한다. 대학원을 가려면 또 돈이 필요하겠지.


이제서야 개구리는 후회했다.

'달칵' 소리가 났을 때라도 도망쳐야 했다.

최소한 가능성이 있을 때 이과라도 가야 했다.


이미 익어버린 뒷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이미 문과에 완전히 젖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과 공부도, 그림도 이제는 할 수 없다.


체념한 개구리는 냄비의 시민권이라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선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학문을 위한 연구보다는 실생활에 직결되는 연구를 하고 싶다. 나의 문제해결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좋다. 문득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의 본업이 생각났다. '경영 컨설턴트'.


띵!

머리에 전구가 켜졌다.


딱 내가 원하는 일이었다. 나의 문제해결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다. 화려한 인생은 덤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바로 돈벌이도 가능하네? 게다가 돈도 많이 벌잖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경영컨설턴트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경영 컨설턴트에 대해 찾아봤다. 검색해 본 결과, BIG4 컨설팅 그룹에 들어가기에는 학벌에서 이미 탈락이다. 이때 포기했어야 했는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 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경영지도사’라는 자격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미련한 나는 그것을 경영컨설턴트가 되기 위한 유일한 동아줄로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그 자격증은 쓸모가 없다고. 컨설팅을 하시는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실무경력을 쌓거나 대학원부터 가라고.


하지만 이미 지도사에 꽂힌 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길이 아닌 것들을 시작할 때에는 다들 부정적인 말만 한다'고 생각했고 '결과로 보여주면 말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그나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시험공부뿐이다. 대학원을 가기에는 돈이 없고 실무경력을 먼저 쌓자니 어디에서 무슨 경력을 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경리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렇게 나는 그 동아줄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도 안 한 채, 지푸라기 동아줄에 목숨을 걸었다.


서울로 상경해 고시원에 자리 잡았다. 아르바이트와 짧은 인턴 생활로 번 돈으로 전업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새벽같이 나가 인근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했다. 도서관 오픈 시간인 7시는커녕 한참 전인 6시 30분 내외로 도착해 기다란 줄의 꽁무니에 선다. 그러고도 열람실 좌석을 보장할 수 없다. 한국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니. 충격적이기도 하고 같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나도 열의를 다졌다.


매일 아침에는 편의점에 들렀다. 도시락을 하나 사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편의점 도시락 하나를 사서 2등분 해 아침과 점심으로 나눠 먹었다. 저녁은 굶었다. 그렇게 하루 2끼를 먹으며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악착같이 공부했고 마침내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실무수습도 받았다. 이제 어엿한 경영 컨설턴트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개구리의 목에 '등록 경영지도사'라는 멋진 리본이 둘러졌다.

개구리는 드디어 이곳, 냄비의 시민권을 얻은 줄 알았다.




경영지도사에 합격하자 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취득에 회의적이던 교수님도 경영지도사의 위상이 꽤나 올랐다며 경영지도사 자격을 취득하기 쉬웠던 극초기에 본인도 진작에 딸 걸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는 나에게 사투리만 고치면 지도사 시험 강사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역시. 성과로 보여주니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하지만 그 태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도사를 따고 바로 성과가 나질 않으니 사람들의 태도도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역시 쓸모없는 자격증'이라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입을 모아 내게 말했다. 그렇게 나는 지도사 자격증이 취업에 정말 무쓸모 한 자격증이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한 사람이 되었다.


속은 상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보여줄 성과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7년이 흘렀다. 8년 차 경영지도사.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단 한 번도 전문가로서 페이를 받고 경영 컨설팅을 해본 적이 없다.


경영지도사에 대한 부심은 나의 목을 옭아맸다. 나는 그 리본이 나의 숨통을 조이는 것도 모른 채 관련이 없는 업무에 지원을 할 때에도 항상 이력서에 경영지도사를 적어놓았다.


그러면 면접에서 받는 질문은 2가지. 지도사를 모르는 면접관의 경우에는 '경영지도사를 따면 좋은 점은?', 지도사를 아는 면접관의 경우에는 '경영지도사니까 경영 컨설팅 사례를 말해보세요.' 나중에는 '경영지도사 N년차'인 점이 추가로 강조되며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항상 듣게 되는 면접 질문.


"경영지도사 N년차이신데, 경영 컨설팅 사례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처음에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실제로 성과가 없으니까. 그리고 탈락. 나중에는 없다고 말했다. 또 탈락. 마지막으로 쥐어짜내서 말해보았다. 지인 대상으로 경영 컨설팅을 해본 경험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탈락.


탈락. 탈락. 탈락. 성과가 없으니 면접에 임하더라도 보여줄 성과가 없어 경력을 만들 수 없다. 그제서야 나는 경영 컨설턴트를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 경영지도사를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입사 지원에서 경영지도사를 빼버렸다.


변명하자면 역시 돈과 경력이다. 실무수습이 끝난 후 식비는커녕 당시 살고 있던 고시원 월세 20만 원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어렵사리 본가로 내려갔다. 부산에서는 경영 컨설팅 관련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있어도 경력 있고 차가 있으신 분들을 위한 자리였다.


많은 자리가 그렇지만 특히나 경영 컨설팅은 신입이 시작하기에는 훨씬 힘든 일인 것 같다. 경력자가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다. 불만은 생겼지만 구인하는 입장도 이해는 간다. 컨설팅이라는 것의 특성상 컨설턴트가 컨설팅을 받을 사람보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덤으로 컨설팅 노하우도 풍부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다양한 단기 아르바이트부터 그렇게도 원치 않았던 회계 관련 업무까지, 합격만 시켜주면 근무지에 맞춰 전국으로 이사를 다녔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생계는 굶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였다.


대부분의 업무에서 나는 신입의 경력으로 매번 경력직 자리를 뚫고 몸과 마음을 다 갈아 넣으며 일했다. 그리고 과로사로 죽을 것 같거나 매일 퇴근길에 '차에 치여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아차, 도망치듯 퇴사하기를 반복했다. 그게 근무 기준 2~6달. 그렇게 퇴사를 하고 나면 바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모아둔 돈으로 1~2달을 쉰다. 병원에 갈 수는 없다. 병원비가 부담스럽다.


돈이 없다. 한 달 치 생활비가 남았을 때, 또 닥치는 대로 일을 구한다. 당장 써주기만 하면 오케이. 나는 그렇게 계약직과 퇴사와 몸 져 누워있기를 반복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빚은 없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나는 항상 당장의 생계가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정규직의 문을 두드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운이 많이 나빠 준비하는 사이 사라지거나 정규직에 취직을 했더라도 11개월이면 어김없이 잘려서 그렇지.


정규직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원가 분석사 시험을 공부할 때, 공장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공장을 다니는 점에 기존의 직원들에게 약간은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멘사 회원인 점을 어필했다. 경리 언니는 그날 저녁에 따님과 식사를 하며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의 통찰과 위트를 자랑하기 위해 다음날 현장으로 내려와 우리에게 따님의 말씀을 전했다.


"우리 딸이 우정 씨 얘기 듣고 그러더라고. '멘사 회원이 왜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 멘사 회원 아니고 멘스(생리) 회원 아니야?'라고. 푸하하하하하하."


경리 언니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기분이 너무 나빠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그 대단하다는 멘사 회원씩이나 돼서도 여기서 이러고 있네.'


경영 컨설팅에 관련해서 문을 두드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 아르바이트나 사무보조, 경리 등의 일을 하고 있으면 역시 어렵게 취득한 경영지도사가 밟힌다. 하지만 경영지도사는 상근직으로 잘 쓰이지 않는다. 게다가 경력 없고 창업도 하지 않은 경영지도사는 정말이지, 쓸모가 없다.


경영지도사는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창업 지원 관련 일이라도 해보고 싶어 창업 보육매니저를 취득했다. 이쯤 되니 내 노력이 가상했는가 보다. 하늘에서 나에게 기회를 한 번 주셨다. 취업 사기를 당해 근무 중이던 경리 보조를 11개월까지만 채우고 나가라고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때마침 구인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재무관리 경영지도사(필수), 급여 최저임금, 6개월 계약직."


당시 나는 지방에 있었고 월세 계약 기간이 2달가량 남은 상태였다. 구인 업체는 서울/경기권이다. 월세 문제로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 이번 기회 아니면 언제 또 지도사 써먹어 보려구.'


그렇게 모셔지듯 입사해 6개월 동안 업무를 잘 수행했다. 업무도 잘 가르쳐 주시고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신 과장님과 나를 믿고 전적으로 지지해 주신 부회장님 덕분이었다. 심지어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과장님께서 정규직 제안을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다 들어줄 테니 계약 연장해서 1년 채운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약간의 문제를 알아버렸고 나는 그게 나의 마지막 동아줄인지도 모른 채 회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귀하디 귀한 황금 동아줄을 걷어차버렸다.


'내가 회사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잘못했다는 인식보다는 그런 짓을 벌인 내게 충격을 받았다.


'자기주장은커녕 말도 못 하는 내가 소리를 질렀다고? 그것도 무려 회사에서?'


드디어 내가 미친 줄 알았다. 놀란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알아봤다. 용기 내서 전화도 해봤다. 병원비를 알아야 갈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전화해 보니 병원비가 그렇게 비싸지는 않은 편이라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꽤 오랜 예전부터 쭉.


잠깐 다른 길로 새서 실컷 고생을 해보니 역시 어차피 최저임금 인생일 거라면 창업 지원 기관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그 길로 1인 창업 지원센터 실장, 청년창업센터의 2달 한 실직을 거쳤다. 그리고 드디어 무려 경영 컨설팅 회사에 컨설턴트로 당당하게 입사하게 되었다.


'드디어 나도 날개를 펼칠 때가 온 것인가!!'


정말이지 이번에는 드디어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줄 알았다. 하지만 날아오르기는 개뿔. 나의 분위기는 전문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나의 능력은 그곳에서 원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날아오를 날개도 없으면서 날아오를 생각을 했으니 그 결과는 당연한 추락이다. 그렇게 나는 한 달 만에 잘리게 되었다.


바닥으로 추락하자 나의 자리는 이곳이라는 듯이 온갖 나쁜 일들이 물귀신처럼 들러붙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급한 마음에 아르바이트를 하려다 부동산 사기를 당해버렸다. 부동산 사기에 그간 굶어가며 모아둔 돈은 물론이고 당장 이번 달 생활비까지 싹싹 긁어 전 재산을 날려버렸다. 수중에 정말 단 돈 2만 원도 남지 않은 상황.


일일 아르바이트라도 구해보려 했지만 마침 코로나 시즌이라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차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고 자전거도 물론 없다. 저질체력이지만 먹고살기 위해 여름 땡볕에 하루 4시간씩 배달을 다녔다. 심야에는 돈을 더 준다는 말에 심야에 배달을 추가로 다녔다.


심야에 배달을 위해 콜을 받고 가게 앞을 서성이고 있으니 자주 배달을 가는 전집 사장님이 걱정도 해주신다. 여자가 심야에 혼자 나다니면 위험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굶어 죽으나 사고를 당해 죽거나 내게는 똑같다. 아니 그래도 누워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노력이라도 하다 죽는 것이 나은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정말 하루살이가 되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개구리는 깨달았다.

앞다리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떻게든 기어 나왔어야 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을 우물쭈물하면서 이때까지 몰랐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정신력과 체력이 다해 정말이지 이제는 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 보고자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합격한 창업카페 매니저. 수습 기간 2달 포함 총 1년 계약직. 여기서 계약기간을 채우고 나면 다음 구직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여기 계약기간만 버티면 먹고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버겁지만 그래도 내 능력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 희망을 가져본 그때. 아빠의 시한부 판정 소식을 들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마침 형식적인 수습 기간이 끝나간다. 이제 안전하게 계약기간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부산으로 내려가면, 그것도 부산 끄트머리인 기장으로 내려가면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직 서울 집 계약기간도 반년이 넘게 남아있다.


'이대로 나의 생계를 위해 서울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아빠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부산으로 가야 할까?'


주변에서는 절대 내려가지 말라고 뜯어말렸다. 가족의 임종은 지켰지만 그 뒤로 몇 년째 취직이 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 정도의 바닥 인생은 노력하면 또 가능은 하지만, 아빠와의 시간은 정말이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부산으로 내려가 이번에는 집 근처에서 일을 구하기 위해 그나마 있는 경리 일자리에 지원했다. 최대한 아빠와의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하지만 6개월이 넘도록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렇게도 무시했던 경리였는데 이제는 경리조차 되지 못한다니….'


정말 모든 체면을 다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지원했다. 경리는 물론이고 공장 생산직과 캐셔, 판촉 등등등. 하지만 한 군데서도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간신히 구한 직장은 운 좋게도 도보 20분 거리에 위치한 공장. 나의 업무는 공식적으로는 사무보조, 실질적으로는 공장 내 모든 업무의 보조.


일자리를 구해서 기쁜 마음 반,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착잡한 마음 반. 그래도 열심히 일했다. 공장에서 원하는 그런, 빠른 적응이 안 돼서 그렇지.


현장 반장님의 눈치를 보기 위해 3, 40분 일찍 와 매일 아침 현장에 나가 아침 조례를 받고 사무실에 올라온다. (아침 조례 참석은 사무직 직원 중 내가 유일하다.) 사무실에서 그날의 생산 목표 분량을 챙긴 후 경리 언니들의 보조를 하다가 입출고 관리를 한다. 필요시 물류 업무인 택배 포장 및 발송 그리고 정말 가끔 생산 현장 투입도 되는 등 정말 공장의 모든 영역에 보조로 쓰였다.


열심히 하면 뭐 하나. 공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빠릿함과 센스가 없어 입사 1주일차부터 매주 평가 당하며 혼이 났다.


"우정 씨는 들어온 지 벌써 N주찬데 아직도 그거밖에 못해요?"


나는 그렇게 아예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개구리는 요리도 되지 못하고 바닥에 눌어붙어버렸다.




그리고 올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셋 중에 공부도 가장 잘 했던 나인데, 그나마 가장 기대가 높았던 게 나였을 텐데. 아빠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내 모습이 공장 사무보조라니. 최대한 아빠가 걱정 덜 하고 눈 감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래도 아빠의 마지막 기억에 최대한 그래도 잘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 길로 나는 공장을 퇴사한 후, 다시 창업 지원 업계에 도전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경영 컨설팅 사례를 요구받았고 어떤 대답을 하건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지원해 보고 창업 지원 업무를 포기하려던 찰나,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던 곳이 지금의 직장이다.


아빠는 당초 1년의 시한부 기한을 넘어 무려 1년하고도 6개월을 더 살아계셔 주셨다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물론 지금의 내 상태는 이 꼬라지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빠가 기억하는 (관심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내 마지막 모습은 그래도 나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던 모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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