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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우지렁이 Aug 06. 2024

죽을 때 돈 싸 들고 갈 거는 아니잖아?

['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계약기간 만료 (2/4)

웹소설 공모전에 도전 중인 11월 5일. 나는 후줄근한 패션으로 버스에 몸을 싣고 서면으로 가고 있다. 오늘 나는 '미친 거지'다.


기회는 주로 사람을 타고 온다. 하지만 나는 따로 사람을 만나지는 않으니 이렇게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기회를 줍나 보다.


세상이 뿌린 두 번째 기회는 '독립영화 거지 출연'이었다.


이번에도 프로그램 홍보차 들어가 있던 오픈 채팅방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영상 동호회 오픈 채팅방이다. 불과 며칠 전, 채팅방에 누군가 들어와 본인을 대학생 감독이라고 소개하며 다짜고짜 거지 단역 출연자를 구인했다. 그 동호회 특성상 꽤나 폐쇄적인 분위기이기도 하고 영상을 찍고 싶은 사람들 위주로 모인 곳이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준비된 거지 여기 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깐 동태를 살피던 나는 채팅을 쳐버렸다. 배우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오픈 채팅방을 전전하고 있을 감독의 모습이 프로그램 홍보를 위해 여러 채팅방을 전전하는 내 모습과 겹쳐 보여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부스스한 머릿결과 기가 다 죽어 초라한 내 모습이 딱 거지꼴이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칙칙하고 얇은 녹색 후드티와 발목이 달랑 보이는 검은 바지, 숨이 다 죽은 분홍 패딩과 발목이 다 까진 운동화를 신고 서면으로 갔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 한 매장이 눈에 박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다가 결국에는 발걸음마저 멈춰버렸다.




고디바.


그 유명한 고급 초콜릿의 대명사 '고디바' 매장이 부산에도 있었다니. 매장의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명성에 압도된 나는 매장에 들어갈 수도 지나칠 수도 없이 길 한복판에서 매대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거지였다. 초콜릿 덕후 거지는 꿈의 음식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1라운드. '엄청 비쌀 텐데 그냥 지나가자' VS '그래도 한 개쯤은 사 먹어보자'의 대결.


문제는 가격.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여튼 엄청 비싼 초콜릿이란다. 그때 혀가 말했다. '200만 원 다 쓰고 죽는다며? 이거야말로 돈 쓸 가치가 있는 일 아니야? 일종의 버킷리스트에 들어갈 만한 음식이잖아.' 혀의 논리로 1라운드에서는 '그래도 한 개쯤은 사 먹어보자.'가 승리했다.


2라운드. '지금 사갈까?' VS '이따가 사갈까?'


이번에는 구매 시기의 문제. 이번에는 다리가 말했다. '나중에 여기로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고 근처에 오더라도 내가 녹초 상태면 나는 그냥 집으로 가버릴 거야. 그러니까 지금 사.'라고. 다리의 논리를 듣다 보니 문득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고디바를 다시 만날 일이 언제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도 추가되었다. 2라운드에서는 '지금 사갈까?'가 승리했다.


그렇게 거지는 고급 초콜릿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이 많았고 다들 익숙하다는 듯 빠르게 초콜릿을 고르고 구매하고 있었다. 마침 수능이 다가오고 있어 대량 구매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지는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고 멀리서 흘금흘금 매대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초콜릿의 종류가 많아봐야 3~4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종류가 제법 된다. 케이크도 있다. 가격도 상상 이상으로 부담스럽다. 거지의 눈이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뭘 사야 하지?', '생각보다 너무 비싼데. 그냥 나갈까?'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버텨야 해!' 거지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눈을 부라렸다. 잠시 후.


"맛있게 드세요."


그렇게 영원 같던 시간이 흐르고 계산을 마친 거지의 손에 3가지 초콜릿이 들어있는 큐브가 놓였다. 그렇게 나의 취향을 위한 첫 구매가 이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준비를 하면서 처음으로 나를 위한 선물을 살 수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큐브를 깠다. 형형색색 예쁘게 포장된 사탕 모양의 초콜릿들. 흡사 해리 포터가 마법학교로 가는 기차에서 사 먹은 초콜릿 같다. 한참을 구경하다 적당히 4등분으로 나눴다. 내 몫과 엄마, 여동생, 남동생 몫으로 나눈 것이다.


딱 맞게 모두가 3가지 맛을 다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내 몫의 초콜릿 3개 중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비싼 초콜릿은 비싼 값을 충분히 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고급 초콜릿의 식감. 다른 맛도 궁금하다. 얼른 또 하나.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 초콜릿의 다채로운 풍미가 상상을 초월했다. 시도하지 않고 견뎌내지 않았다면 절대 맛볼 수 없었을 달콤 쌉쌀하고 부드러운 풍미였다.


순식간에 초콜릿 3개를 해치우고 아쉬운 마음에 혀끝에 남아있는 뒷맛을 느끼다 깨달았다. 돈을 버는 이유는 돈을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써서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화폐는 가치의 교환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경제를 그렇게도 좋아했던 내가 돈을 내 목숨과 동급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내 목숨보다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돈. 중요하다. 하지만 먹고살려고 돈을 버는 거지 돈 벌려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평생 모르고 살았다. 가치의 교환 수단이 내 목숨보다 중요했다니.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주 죽고 싶었 보다. 그 기준에서 본다면 아등바등 죽어라 일을 해도 한 사람 몫도 잘 해내지 못하는, 가성비 제로인 사람이었으니까.




'더 먹고 싶은데….'


이대로 놔두면 나눠둔 초콜릿들마저 내가 다 먹어치워버릴 것 같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나눈 초콜릿들을 가지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여동생은 근처에서 자취를 하기에 여동생 몫은 다시 큐브 안에 넣어 포장해뒀다.) 남동생 몫을 남동생 방에 넣어주고 엄마 방으로 갔다.


"엄마 이거 먹어."


"이게 뭔데?"


"고디바라고 엄청 비싼 초콜릿임. 엄청 비싼 거니까 아껴먹어!"


시큰둥한 엄마에게 비싸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방 안에서 너 혼자 비싼 초콜릿 다 처먹고 꼴랑 이거 3개 나눠주나?"


순간 울컥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 다 처먹은 거 아니거든! 비싼 거라서 나도 3개밖에 못 먹었거든! 그럴 거면 그 초콜릿 나 줘라. 나 먹게."


"식탁 위에 밥 있다. 나온 김에 밥이나 처먹어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엄마는 밥이나 처먹으라며 나를 돌려보냈다. 식탁 위에는 남동생이 지저분하게 헤집어 먹고 남은 고기가 있다. 온 가족이 거의 다 먹고 국물만 흥건하게 남은 밑반찬이 있다. 밥을 푸고 자리에 앉았다.


문득 그 모든 것들이 다 싫어졌다. 항상 가족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도. 심지어 그 음식이 조금 상했더라도 거리낌 없이 먹어치우는 내 모습과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도. 마치 나 스스로가 잔반처리기같이 느껴졌다.


'뭘 먹으라는 거야.'


밥을 먹자니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대로 밥을 다시 밥솥에 넣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둘러썼다. 집의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집과 직장과의 거리도, 집 안에서의 잔반처리기 신세도, 자유는커녕 사생활도 없는 생활도, 마지막으로 매일 자살 충동을 일으키는 통유리 창도.


그리웠다. 작고 낡더라도 나만의 공간이. 특히 흔들의자 생각이 많이 났다. 이따금씩 불안과 자살 충동이 엄습하면 흔들의자 위에 덮어둔 담요로 몸을 싸매고 쪼그려 앉아 열심히 의자를 흔들면서 스스로를 달랬던 기억이, 그 위에서 다양한 자격증 공부를 하던 기억이. 흔들의자는 나에게 자상한 엄마이자 공부방이었다.


다시 떠올랐다.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빠의 임종을 지키러 왔고 임종을 지켰다. 나도 이제 더 이상은 이 집에서 고통받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나가자. 그리고 최대한 내 취향대로 꾸며두고 살자.




바로 다음 주인 11월 12일 토요일에 자취방을 알아보고 13일 일요일에 가계약을 했다. 이사 날짜는 한 달 후인 12월 13일로 정했다. 이사는 차가 있는 여동생에게 부탁해뒀다. 가장 큰 난관은 엄마의 반대였는데 마침 이사할 날에 엄마가 집에 없었다. 잦은 이사 경력을 살려 오전 시간 동안 정말 최소한의 짐만 싸서 이사해버렸다.


집에는 미리 주문해둔 예쁜 침대와 침구, 흔들의자와 담요와 스탠드, 그리고 세제 등의 생필품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집을 채울 예산으로 100만 원을 잡었는데 이미 80만 원가량을 소비했다.

남은 예산은 20만 원. 적은 돈으로 예쁜 물품들을 사기에는 국민 가게 다이소가 최고다. 바로 자취 집 근처 다이소로 향해 식기와 수저, 식탁과 욕실화 등 자잘한 물품들은 나의 취향대로 사 왔다. 그렇게 한껏 나의 취향으로 꽉 채워진 집이 완성되었다.


내 취향의 침구에 파묻혀 생활하고 잔다. 내 취향의 식기에 음식을 담아 먹는다. 내 취향의 물건들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모르고 살았을 때에는 몰랐는데 환경만 바뀌어도 삶의 질이 수직 상승하더라.


귀여운 그릇에 밥을 먹으며 입맛이 돌아왔다. 귀여운 욕실화를 신고 귀여운 칫솔꽂이발 매트를 보며 한 번이라도 더 자주 씻게 되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게 행복이구나.'


또한 회사와의 거리도 왕복 3시간 거리가 1시간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1시간을 더 잘 수 있게 되었고 1시간 먼저 집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남은 계약기간 3개월 반을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자유'가 다시 생겼다.


정말이지 돈은 쓰려고 버는 거고 쓰려고 모으는 거였다. 돈은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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