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계약기간 만료 (1/4)
현재 통장 잔고 약 200만 원.
스스로 만든 인생 게임 규칙 2가지.
첫 번째 규칙 : 최대한 후회가 남지 않는 인생을 살 것.
두 번째 규칙 :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는 순간 미련 없이 떠날 것.
5년째 먹고 있던 정신과 약은 임의 단약하기로 했다. 최근 부산으로 바꾸며 10~20배 뛴 병원 진료비도 부담스럽고 이제는 눈물도 생각도 없는 좀비 상태로 꾸역꾸역 삶을 연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It's showtime!!
마지막으로 억만장자처럼 펑펑 써보고 죽는 거야!!
현실의 나는 프로그램 홍보를 위해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을 전전하고 있지만 머릿속의 나는 이미 부자다. 아니, 용돈을 200만 원이나 받은 부잣집 따님이다. 속으로 손을 비비며 생각했다.
'자, 뭐부터 돈을 써보지?'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하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했지만 하나씩 스스로 질의응답을 해보기로 했다. 하다 보면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겠지.
'첫 번째 질문.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었지?'
'이제 없는데?'
'그러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없어.'
'좋아하는 음식은?'
'모르겠어.'
'…….'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으니 질문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쓸모도 없더니 아는 것도 없다.
'정말 폐급이잖아….'
남은 목숨은 200만 원. 최대한 안 쓰고 가늘고 길게 사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거 최대한 해보고 가는 짧고 굵은 삶을 선택하는 쪽이 좋다. 그러기 위해 규칙을 만들어 인생에 유예를 준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옷 취향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생활비로만 쓰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그때 죽어도 된다. 근데 그럴 거면 굳이 그때까지 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죽는 게 낫지. 아니, 진작에 죽었어야 한다. 그러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200만 원 안에서 최대한 가성비 있게 야무지게 살다 가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원하는 것이 없으니 돈을 쓸 수도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의미 없는 시간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고뇌하고 있는 내가 불쌍했는지 세상은 내게 기회를 던져주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기회는 '웹소설 공모전'.
사실 공모전 소식은 먼저 접하긴 했었다. 하지만 나는 웹소설에 관심도 없고 글도 못 쓰는데 무려 웹소설 공모전이라고? 당연히 흘려보냈던 정보였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 사고 싶은 것들을 고민하다 보니 뜬금없이 공모전 생각이 났다. 이번에는 중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에게 '나 사실 킬러야'라고 거짓말을 하며 놀 때 구상했던 킬러 조직 이야기와 함께.
며칠을 망설였다. 접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의 흑역사. 한국에 킬러 조직이라니. 당시에 조직원들의 코드 네임과 성격들까지 모두 구상했었다. 심지어 한 캐릭터는 친구들에게 실존 인물이라고 거짓말까지 치고 놀았었다. 쓸 생각만 있으면 쓰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니 너무 수치스럽다. 참을 수 없이 부끄럽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다. '이 이야기, 세상에 안 내놓고 죽어도 괜찮냐'고. 답은 '생각나면 미련도 남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났으니 이대로 죽기에는 당연히 아쉽겠지.'였다. 한 번 더 질문했다. '웹소설로 쓰면 그 내용이 죽고 나서도 부끄러울 것 같냐'고. 대답은 '아니오'였다.
죽을 때가 되면 생전에 했던 부끄러운 일들은 무의미해진다(범죄는 제외다). 대신, 살아생전 다 못한 일들이 아쉬워질 뿐이지. 그래, 곧 죽을 사람은 흑역사가 부끄럽지 않다.
심기일전한 후 공모전 요강을 다시 봤다. 두 부문으로 나누어 공모전을 진행하는데, 챕터 부문은 5천 자 이상 원고 1화분에 작품 기획서만 적으면 된다고 한다. 5천 자라는 글자 수에 대한 감은 없지만 1화만 쓰면 된다니 할만할 것 같다.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유의사항에서 눈이 멈췄다.
"높은 수위의 노출과 폭력 묘사는 지양하고, 다음과 같은 작품은 심사에서 제외됨.
가. 19금 성인물
나. …."
당시 내가 구상했던 이야기에서 실존 인물이라고까지 말하며 주력했던 캐릭터는 호색한이다. 그런데 19금은 안 된다고?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역시 포기해야 하나….' 그때 마침 홍보를 위해 들어가 있던 웹소설 작가 오픈 채팅방이 생각났다. 물어보자. 후닥닥 타이핑을 치고 마음 바뀌기 전에 전송.
"안녕하세요. 이번 OOO 웹소설 공모전에 지원해 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XXX 정도의 19금 표현은 가능한가요?"
평소의 나였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어보다니.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행동부터가 겁이 나고 무섭다. 거기다가 질문을 한다고? 차라리 '안 된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다행이지. 대답을 못 들으면? 애써 용기 냈는데 대답도 듣지 못한다면?
하지만 심사 대상 여부가 불확실한 노력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질문 한 번으로 확실시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모임장님의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되었다!' 그 주 주말, 나는 기장 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모전 마감은 11월 6일 일요일, 오늘은 10월 29일 토요일.
내게 남은 시간은 약 2주. 디지털 자료실의 1일 이용 가능 시간은 3시간. 하지만 다음 주말 중 하루는 할 일이 있어 하루밖에 시간이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가능한 시간은 총 3일, 9시간. 일단 해보자.
첫 주말 이틀, 총 6시간을 투자했다. 가장 먼저 공모전 제출 양식을 다운받아 봤다. 그냥 신청서랑 전체 줄거리랑 1화 분량 정도만 적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뜻 모를 용어들이 난무한다. 적으라는 것이 너어무 많다.
장르라는 용어는 알겠는데 장르의 종류를 모르겠다. 킬러가 나오는 장르가 뭐가 있지? 차후에 트릭도 쓸 건데. 스릴러? 추리소설? 일단 추리소설로 적었다.
로그 라인? 뭔 말이지? 일단 패스.
기획의도? 웹소설은 스낵 컬처라는데 기획의도는 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딱히 의도를 가지고 쓰는 글은 아니라서. 이 부분도 일단 패스.
등장인물? 그래. 등장인물은 뜻도 알고 이미 다 나와 있으니까. 이름만 정하고 금방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시놉시스랑 심지어 트리트먼트는 또 뭔지. 아무리 서칭을 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트리트먼트는, 머릿결에 영양 주는 제품 생각이 계속 나 글자를 쳐다보고 있을수록 입안에 트리트먼트 맛만 난다.
특히 로그 라인과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는 그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그 말 같다. 내용을 채워 넣기 전에 용어부터가 난관이다. 등장인물 부분을 제외하고는 단 한 자도 쓰지 못했다. 아니 무슨 말인지조차 모른다.
시간이 없다. 이대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일단 원고부터 쓰기로 했다. 첫날에 2천 자 정도를 쓰고 둘째 날에 고작 천자를 더 써서 3천 자를 채웠다.
'5천 자라는 거. 생각보다 분량이 많잖아?'
2천 자나 써야 하는 데다가 작품 기획서도 거의 채워지지 않은 채 첫 주말이 흘렀다.
다음 주이자 공모전 제출 마감일인 11월 6일 일요일. 남은 시간은 3시간.
원고를 먼저 써야 하나 양식을 먼저 채워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역시 하던 것을 먼저 마무리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 남은 3시간 중 2시간을 투자해 간신히 원고 1화분을 완성했다.
남은 시간은 단 1시간. 1시간 안에 양식을 채우고 제출까지 완료해야 한다. 바로 양식의 빈 부분 중 첫 부분인 로그 라인으로 커서를 옮겼다. 손가락이 멈췄다.
'그… 고생했는데 딱 5분만 쉬었다가 할까?'
리프레시를 위해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강렬한 햇빛에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운 터널 끝에서 맞이한 환한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내가 뭐라도 해보다니!'
문득 19금 설정 정도는 가능하다고 알려준 웹소설 오픈 채팅방이 생각났다. 밖에서는 핸드폰 액정이 보이지 않아 도서관 복도로 숨어들어와 채팅방에 글을 썼다.
"저 방금 1화 다 썼어요. 이제 양식 채워서 투고하면 되는데요. 장르가 뭔지 로그 라인이랑 시놉시스 그리고 트리트먼트가 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ㅠㅠ"
전송 시간을 보니 딱 5분이 지났다. 제한 시간 55분. 일단 해보자. 현재 남은 부분은 로그 라인과 기획의도,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우선 로그 라인 먼저. '로그 라인? 줄거리를 말하는 건가?' 아무리 다시 봐도 뒤에 적으라는 시놉시스랑 트리트먼트랑 같은 말 같은다. 형식과 분량의 차이가 있을 뿐. 상세하게 적었던 원고에서 거슬러 올라와 전체 스토리에 대한 트리트먼트, 시놉시스, 로그 라인 순으로 점점 압착해서 분량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 3분. 남은 부분은 기획의도. '기획의도라….' 잠시 고민하다 역시 기획의도라면 문제와 문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판단. 평소 갖고 있던 사회 문제와 결부시켜 작성하다 시간이 다 됐다. 마지막 1분. 급하게 내 메일로 전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다 왔어. 나머지는 집에서 하면 돼.'
켜지는 데에만 한 세월. 글자를 입력하면 나의 타이핑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컴퓨터 사양. 한숨 한 번 푹 쉬고 타이핑을 시작하려던 그때, 채팅 알림이 왔다. 모임장님이었다.
"괜찮으시면 한 번 봐드려도 될까요?"
'웹소설 수업도 진행하시는 모임장님께서 내 글을 봐주신다니!' 컴퓨터의 속도에 맞춰 아까 쓰다만 기획 의도를 채워 전송했다. 접수 마감 30분 전, 답장이 왔다.
"글은 잘 쓰셨네요. 장르는 추리가 아니고 '킬러물'입니다. 제목은 심플하게 정정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킬러다.' 같은 거로요."
'에에에에엑?! '나는 킬러다.'라니. 무슨 그런 오글거리는 제목을….'
장르를 정정하기 위해 양식을 열었다. 내가 써놓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트럼프 카드가 어쩌고 체크메이트가 어쩌고.' 미쳤다. 이게 더 부끄럽다. 이거는 죽어서도 수치스러울 것 같다. 모임장님의 말씀대로 장르는 킬러물로, 제목은 '나는 킬러다.'로 정정한 후 메일을 보냈다. 마감 1분 전이었다.
내가 할 일은 끝났다. 공모전 접수는 했다. 이제 와서 19금을 포기하지 못한 점이 후회됐다. 정말 열심히 썼는데 그 부분 때문에 심사에서 제외된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모임장님께서는 이 정도 19금 표현은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웹소설의 주사위는 굴러갔고 나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 눈을 붙여야 한다. 침대에 누워 아무리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잠시 눈을 떠보니 이미 새벽 2시다. 오늘도 6시 2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잠이 오질 않는다. 뭔가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감인지 저질러버렸다는 생각인지 심장이 세차게 뛰는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