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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우지렁이 Aug 14. 2024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계약기간 만료 (4/4)

새해가 시작되는 2023년 1월 말. 오프라인 소개지 제작도 끝났고 불가능해 보였던 컨설팅 프로그램 진행도 100% 달성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금 컨설팅을 마친 컨설턴트님과 수혜기업 대표님을 배웅했다. 홍보 게시판에서는 내가 만든 홍보지가 휘적휘적 나부끼고 인포메이션 옆에는 내가 만든 홍보지가 대량 비치되어 있다.


'내가 만든 거라니.'


마치 서점에 놓인 책자처럼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는 홍보지를 보며 내적 흥분을 주체하기 어렵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정말 내가 만든 작품들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가 보고했다.


"마지막 컨설팅 끝났습니다."


"수고했어요."


내가 업무를 완수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으셨던 팀장님께서 짧지만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이것으로 나의 과업도 100% 완료다. 시작할 때에도 불가능해 보였던 과업 양이었고 달성한 지금도 달성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게 된다고? 게다가 이렇게 빨리?'


타인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는 일은 나의 노력과 상관관계가 크지 않은 일이다. 내가 100만큼 노력한다고 해서 타인의 마음과 행동을 100만큼 움직일 수는 없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올 수 있는 영역은 '나 스스로에 대한 것'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봐도 내 노력이 가상해 하늘이 도운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차곡차곡 운이 쌓여 과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노력이 과하게 기특했나 보다. 너무 많이 도와주셨다. 과업을 너무 빨리 끝내버려서 남은 기간 동안 할 일이 없다.




2월 3일. 할 일이 없다. 정말이지 할 일이 하나도 없다. 계약 만료까지 약 두어 달이나 남은 상황.


'남은 기간 동안 뭘 해야 하지….'


키보드 위에서 달그락달그락 손가락을 굴리고 있는데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알림이 올 일이 없는데?'


친구도 없고 SNS도 없다. 항상 조용한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처음 보는 네이버 알림이 2개나 있다.


'1월 리뷰 이벤트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리뷰 이벤트 따위 참여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사기꾼들이 실수로 알림을 두 번이나 전송한 모양이다. 보안 강화를 위해 알림의 근원지를 추적했다.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확인해 보니 정말 만 원씩 총 2만 원이나 적립되어 있다.


'내 핸드폰이랑 아이디를 다 알고 있다고?!'


공포에 질린 나는 알림의 근원을 끝까지 추적했다. 알고 보니 최근 구매한 물건의 리뷰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었다. 이벤트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제품이 정말 좋아서 쓴 리뷰가 당첨된 것이었다. 그제야 안도한 나는 다시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굴리기 시작했다. 행운의 여신이 내게 넛지(nudge) 한 것도 모른 채.




“우정 씨 지금 뭐 해요?”


예전에는 팀장님의 저 질문이 공포스러웠다. 일을 정말 하고 있지 않을 때 들으면 정말 일을 하지 않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았고, 일을 하고 있을 때 들어도 뭔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것이 있으셔서 하시는 말씀 같아서. 하지만 이제는 겁날 것이 없다. 이곳의 분위기는 본인의 과업만 완수하면 그만이니까.


"무슨 일이시죠?"


"아직 계약기간이 두 달이나 남았는데 과업이 다 끝나셔서 이번 달에 우정 씨 업무를 적을 게 없네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의 자리에 대한 채용공고에서 담당업무를 재확인했다. 그나마 '입주사 관리' 부분에서 조금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다. 다른 업무들은 이미 수행이 완료되었거나 상시 업무라 해당이 없다.


'입주사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한참을 고민하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무료 교육 사이트인 'K-MOOC'가 생각났다.


'이거다!'


K-MOOC에서 입주사들의 아이템 관련 수업을 듣고 요약정리해 드리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해당되지 않는 기업들에게는 공모전 정보를 드리면 좋을 것 같다. 공모전에서 수상한 트로피를 갖고 가시는 입주사 대표님을 뵌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팀장님, 입주사 아이템 관련 교육 요약정리 및 공모전 정보를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K-MOOC에서 입주사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주제의 강의들을 추려냈다. 그중 가장 많은 입주사들에게 도움이 될 주제로 '스토리텔링'이 도출되었다. 공모전 사이트 목록도 정리했다. 그렇게 남은 기간 동안 스토리텔링 관련 강의 요약정리 및 각 입주사별 공모전 소식을 전해드렸다.


덕분에 겸사겸사 스토리텔링 관련 신화와 철학 등 스토리텔링의 기본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강원국 작가님께서 강의하신 글쓰기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나의 글쓰기 재능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스토리텔링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2월 28일. 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이번에는 인스타 DM이다.


'인스타에 DM이 올 일이 없는데?'


방치되어 있다가 근래 우리 센터 SNS에 '좋아요'를 누르는 용도로만 사용 중인 인스타 계정에 DM이 왔다.


'예매권 이벤트 당첨을 축하합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예매권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쿡!' 둔한 나를 위해 행운의 여신이 조금 더 세게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이건 또 뭐여?'


이번에는 조금은 덜 놀라고 찾아볼 수 있었다. 앞전의 리뷰 이벤트 당첨 경험으로 심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확인해 보니 홀린 듯이 달았던 딱 하나의 댓글이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었다.


'댓글 하나로 영화 예매권을 얻을 수 있다고?'


그날부터 나의 SNS 알고리즘은 체험단, 이벤트, 서평 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SNS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신상들은 모두 나의 욕망을 자극했다.


'이것도 먹어보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어. 오, 이거도 읽어보고 싶은데?'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나의 눈은 휙휙 돌아갔고 손가락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댓글 한 번이면 응모 완료.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종종 재미 또는 나의 글쓰기 능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댓글을 달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상품들의 체험단, 이벤트, 서평에 응모했다.


여태 나는 원하는 것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원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세상은 항상 수많은 기회들을 뿌려놓고 기다리고 있다. 내가 몰라서, 관심이 없어서 주워 먹지 못했을 뿐이지.




매일 엄청난 양의 택배가 집으로 오고 있는 3월 13일.


'징-.'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뻔하다. 당첨 소식이거나 택배 소식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은 진동에 눈치가 보인다. 하지만 무음으로 했다가는 혹시나 업무전화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까 봐 무음으로 할 수도 없다.


'안되겠다. 이제 그마안-!!'


도서 세트 서평의 이중 당첨을 끝으로 '이벤트와 체험단 응모 중단' 선언을 했다.


'질릴 때까지 충분히 한 것 같아.'


처음에는 좋았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많으니까. 기대평도 쓰고 밸런스 게임도 하고 사행시도 썼다. 이벤트 신청은 도전적이고 재미도 있고 당첨되면 성취감까지 최고다. 당첨되면 좋고 안 되면 당연한 일이라 부담도 없다. 물론 가시적인 비용 없이 신상과 신간들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체험단과 이벤트에 응모할 당시에는 응모한 것 대비 10%도 당첨되지 않을 줄 알았다. 찍기 운, 뽑기 운이 정말 너무 안 좋았던 나였으니까. 그래서 부담 없이 응모했었다. '하나만 걸려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간 모아뒀던 행운들을 한꺼번에 몰아주기라도 하듯 행운의 여신은 내게 너무 과한 미소를 지어주셨고 그 덕에 당첨률은 무려 80~90%에 육박했다.


덕분에 내 돈 주고는 사지 못할 화장품과 디저트, 건강기능식품들부터 영화 티켓과 신간 도서, 굿즈, 협찬 제품, 인형 등 문화생활까지 누릴 수 있었다. 심지어 니치 향수, 가죽 핸드백, 전자기기 등의 고가품도 내 돈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었다. 우수 서평과 베스트 후기에 자주 선정되어 홍보 글에 대한 자신감도 덤으로 얻었다.


매일 그날의 택배를 집 안으로 들여도 다음날이면 문 앞에 새로운 택배들이 산처럼 쌓인다. 모두 이벤트와 체험단과 서평 택배들이다. '이게 인플루언서들의 삶인가' 생각했다. 택배가 많이 오는 날에는 10개 가까이 오기도 한다. '오래 살다 보니 인플루언서 체험도 해본다'고 우쭐해졌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이 고양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 잦은 당첨 소식에 감정은 금세 무뎌졌다. 당첨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당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되면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났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또다시 오만해졌다.


문 앞에 쌓인 택배들을 보며 느끼던 설렘과 두근거림도 잊은 지 오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문 앞에 한가득 쌓인 택배 상자들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 어느 세월에 저거 다 뜯고 홍보 글은 또 언제 다 써…."


일감들을 집안으로 대충 던져놓고 환복한다. 밥도 먹지 않고 일감들을 뜯고 작업 예정에 따라 분류한다. 당장 작업할 물품들의 사진을 찍고 분석을 시작한다.


'음, 디자인은 평범한데 향기랑 제형이 좀 괜찮네….'


어느샌가 물품을 받고 홍보 글을 쓰는 것이 집에서의 전부이자 부업이 되어버렸다.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밤과 주말에는 집에서 근무한다. 택배를 뜯고 사진을 찍고 물품을 사용하고 책을 읽고 홍보 글을 쓴다. 쉴 틈이 없다. 몸은 상하고 할 일은 쳐내면 쳐낼수록 더더 불어난다.




이지경까지 오자 이제는 미당첨 소식을 접하게 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욕심을 줄이기는 힘드니 응모는 하되 미당첨이 되어 얻지 못하고 글을 안 써도 되게 되는 것이 최고가 되었다. 정신없이 바빠지다 보니 성격도 예민해진다. 그 와중에 주변 사람들은 나더러 물건을 공짜로 얻어 쓴다고 부러워한다. 짜증이 난다.


'정당한 노동의 댓가입니다만?'


내 입장에서는 응모글 작성부터 당첨 물품 수령 그리고 홍보 글을 쓰는 것까지 전부 일인데 공짜로 얻어 쓴다니. 노동의 댓가를 현찰로 받는 것이 아니고 물품으로 받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잦은 당첨 알림부터 물품 수령 그리고 후기글까지 당첨 건별로 전 과정에서 신경이 쓰인다.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설상가상으로 쉴 시간도 없다. 자연스럽게 본업에도 지장이 가기 시작했다. 업무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한계생산성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내게 이 부업은 가성비도 낮다.


'남 좋은 일들만 시켜주다가 내 일은요?'


가성비에 대한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도 좋아하던 서평에서 특히 부각되었다.


가장 좋아했던 서평이었다. 읽고 싶은 신간도 공짜로 읽을 수 있고 서평을 하면서 강제적으로 깊이 있는 책 읽기가 되었으니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석을 통해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전문성 있어 보이는 홍보 글 작성 경험은 추가다.


하지만 책 읽기가 즐거움의 개념이 아닌 노동의 개념으로 바뀌면서 서평은 가장 가성비 떨어지는 업무로 전락해버렸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시간이 시급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이럴 시간에 돈 벌어서 사서 보고 말지.'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물품 응모는 자제하고 서평은 조금 줄이기로 했다. 후기글과 체험단, 서평단을 취미로 할 때에는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본업에 맞먹게 되면서 가성비가 떨어지다 못해 스트레스 과다로 본업에도 지장을 초래한 것이었다. 심지어 하나의 업무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적당히를 하지 못하는 나를 알아 이벤트와 체험단 신청 중단 선언을 한 것이었다.


알고리즘이 내 다짐을 읽은 걸까. 신기하게도 그 즈음부터 이벤트와 체험단 모집 글 대신 기존에 보였던 귀엽고 웃긴 영상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는 영상들을 보며 힐링할 수 있었다. 당첨이 소강되고 여유를 찾았다. 천천히 책을 음미하고 서평 하며 다시금 일상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덕분에 모든 일은 과유불급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말이지 simple is best는 디자인은 물론이고 인생에서도 통용되는 만능 용어다. 그래도 돌아보니 힘든 와중에 재미도 있었고 홍보 글에 대한 자신감도 얻었다. 향수와 디저트 등 갖고 싶고 먹어보고 싶던 고가품들도 모두 누렸다.


경험해 보고 좋았던 것들 중에 지금의 소득으로 구매가 가능한 것들은 조금씩 구매도 하기 시작했다. 아직 구매가 부담스러운 것들은 '나중에 저것들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성공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다. 죽을 준비를 하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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