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우지렁이 Aug 20. 2024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면 관심 가는 일부터 해보자

['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구직급여 (1/4)

만우절 거짓말 같은 백수 생활 1일차이자 지인의 결혼식에서 부케도 받은 4월 1일.


생에 가장 긴 근무 기간인 11개월 근무의 3번째 끝이자 11개월 근무 중 유일하게 계약 만료로 끝난 첫날이다. 오랜 근무 및 바로 전날까지 일하고 백수로 맞이하는 첫 토요일이라 그런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는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결혼식 핑계로 오랜만에 차려입어 기분이 좋을 뿐이다. 친구도 없는 내가 생에 처음으로 부케도 받았다.


'11개월이나 되는 계약기간도 채우고 부케도 받아보다니.'


정말이지 모두 만우절 거짓말 같은 날이다.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선물을 준비해야지. '결혼식 100일째 되는 날에 말린 부케를 돌려받으면 잘 산다'는 속설에 의해 부케를 말려 돌려드릴 생각이다. 최대한 원형을 복원한 부케 액자를 만들기 위해 받은 부케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눈에 담다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남겼다.


실물이 더 예쁘지만 사진도 충분히 예쁘다. 찍은 사진을 보니 친구도 없는데 부케를 받은 사실은 자랑하고 싶다. 홍보차 들어갔던 오픈 채팅방들 중에 유일하게 아직 남아있는 웹소설 작가 오픈 채팅방에 사진을 올렸다.


"부케 받았어요!! 말려서 100일에 돌려드릴 거예요!!"


"어머. 부케 돌려드리려구요? 향초 재료 있는데 드릴까요?"


선의에는 선의가 붙나 보다. 말도 거의 섞어보지 않았고 얼굴도 한두 번 본 사람을 위해 결혼식에 참석했고 부케도 돌려드릴 예정이다. 해본 적이 없어 자신은 없지만 최대한 가성비 있게 준비하기 위해 부케 액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도 아예 섞어보지 않으신 분이 내게 향초 재료를 나눠주신다고 한다.


잠깐 고민했다. 향초는 말린 부케를 돌려드릴 방법 중 가장 대중적이고 무난한 선물이다. 하지만 재료비도 가장 비쌌고 받으실 분의 향 취향도 몰라 선택지에서 지웠던 선물이었다. 대신 향초는 부케 재료가 좀 적고 꽃잎만 있더라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날 언제 봤다고 이렇게 선뜻 나눠주신다고 하시는 거지? 그리고 액자만 만들려고 했는데 향초까지 만들라고? 이거 일이 너무 늘어나는 거 아니야?'


순간 부담스럽기도 하고 조금 귀찮다는 생각을 했지만 선물은 다다익선.


'재료 다 주신다는데 액자 만들고 남은 재료로 하나 더 만들지 뭐.'


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선의를 받았다.


"앗, 괜찮으시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액자는 물론이고 향초 만들기까지 계획에 추가되었다. 집에 오자마자 부케를 인수분해 해 여기저기 널어놓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꽃과 풀들이 예쁘게 말라주길 바라며.




백수 생활 7일째인 4월 7일에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재송동으로 갔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라는 체에 쳐질수록 좋은 것들만 곱게 걸러 남겨져 추억이 되는 모양이다. 학창 시절에는 좋은 기억이 없는 줄 알았던 나조차도 직장 생활에 눈물이 날 때마다 재송동이 배경인 행복한 꿈을 꿨으니 말이다. 그리고 꿈을 꾼 날이면 으레 다짐했다.


'언젠가 재송동에 다시 가보리라.'


그러나 막상 부산으로 돌아오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또 가지 않게 되더라. 멀리 있을 때에는 그리웠는데 막상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되면 소중함을 잃어버리는 곳. 온갖 좋은 것들이 그러하듯 고향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재송동은 내 머릿속에서 뿌옇지만 선명하고 따듯한 색으로 미화되고 있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가까이 있을 때에에~~ 붙잡지 그랬어~~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아빠 생전 집에서 자주 부르던 오승근 님의 노래 가사다. 정말이지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한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나는 최근에도 재송동 꿈을 꿨다. 수구초심이라고 여우도 죽을 때 고향을 그리워한다는데 나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고향에 가봐야겠다. 이번 기회에는 정말 가야겠다. 오랜 숙원을 해소하기 위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그대로였고 많은 것들이 낡았으며 많은 것들이 또 변해 있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장면들을 핸드폰으로 찍기 시작했다.




'찰칵.' 변하지 않은 도로와 삼거리 길을 찍었다. 자주 지나가던 빨간 벽돌의 빵집은 낡고 빈 건물이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가게들이 사라지고 새로 생겨났다. 그리고 여태 보지 못했던 평일 낮 학교와 회사 밖의 여러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어느 가게 옆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줌마에게서 여유로움을 볼 수 있었다. '찰칵.' 그러고 보니 나도 지금은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더라.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때 전동 휠체어로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장애인 분과 건너편 길에서 등산 스틱 두 개를 이용해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씩씩한 노인분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찰칵, 찰칵.' 그들에게서 활기가 느껴졌다. 젊고 사지도 멀쩡한데 속이 썩어 죽을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길을 걷는 노부부의 사랑이 보여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었다. 나도 저렇게 서로 믿고 의지하며 늙어갈 남편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면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나처럼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노인도 볼 수 있었다. 다만 4월의 햇살이 좋아 그런지 그 모습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시장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인정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저 무리에 끼여 음식도 얻어먹고 말도 섞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멀리서 사진만 한 장 찍고 지나다.


평일 낮이라 근무 중인 사람들도 당연히 많았다. '찰칵, 찰칵, 찰칵.' 중간중간 보인 열심히 근무하시는 배달기사님들, 환경미화원님, 유리벽을 닦는 직원분과 낮은 지붕 위에서 페인트를 바르시던 페인트공님 등에게서 열심히 사는 삶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었다. 찰리 채플린 명언에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데 나도 근무할 때에 저분들처럼 아름다워 보였을까. 저분들 중에도 속은 나처럼 썩어 문드러진 분들이 계실까.


산책이 거의 끝나가는 그때, 축축한 무언가가 내 다리에 닿았다. 내려보니 산책길이 마냥 행복한 강아지가 내게도 눈부신 미소를 나눠주고 있다. "헥, 헥, 헥, 헥."


기분 좋은 강아지의 행복에 전염되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엄마 손 꼭 잡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따듯하고 부러워서 그 장면도 '찰칵.' 그 순간 아이가 홱 뒤돌아 나를 확인한 후 엄마를 톡톡 쳤다. 몰래 찍어서 혼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순간.


아이가 별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양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 옆에 브이를 만들어 포즈를 취해줬다. 엄마를 부른 것은 같이 포즈를 취해주자는 뜻이었나 보다. 나는 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찰칵.'


그렇게 나는 고향에서 과거, 현재, 미래와 여유와 열정과 정겨움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살아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음식과 물품 등 나의 소비재에 대한 취향도 눈을 떴다. 그리고 소비를 하려면 돈을 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좋을까?' 역시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면 최고겠지.


'하고 싶은 일은 있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 버퍼링이 걸렸다. 먹고 쓰는 것에 대한 취향은 알겠는데 하고 싶은 일은 아직 없다. 하고 싶은 것들도 원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겪어봐야 알 것 같다.


하지만 돈만 쓰면 금방 알 수 있는 소비재 취향과는 달리, 하고 싶은 일들을 알기 위해서는 돈은 물론이고 시간도 필요하다. 금방금방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꽤 많은 것들이 투자되어야 하다 보니 좀 더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뭘 먼저 해봐야 하지?'


관심 가는 일을 찾는 것은 역시 교육으로 시작하는 게 무난하다고 판단했다. 업무가 아니다 보니 부담 없이 시도해 볼 수 있고 해보고 좋으면 최고고 아니라면 말면 그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수업을 듣는 것도 돈이다. 최소한 수강료와 재료비가 필요하다. 덤으로 수업을 듣는 동안의 생계비도 필요하고 일을 하지 않는 기간의 경력과 수입에 대한 기회비용도 추가다.


'비교적 저렴하게 수업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생계비와 경력 공백은 어쩔 수 없어도 수강료와 재료비 부담이라도 덜고 싶다. 고민하다 경기도 평생학습관에서 무료로 영상편집을 배웠던 사실이 떠올랐다. 부산에도 평생학습관이 있겠지. 부산 평생학습관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마침 며칠 뒤 수강신청이 시작될 예정이다. 강좌 리스트를 훑어보니 드물지만 직장인을 위한 평일 야간 수업도 있고 주말 수업도 있다.


'낮에만 교육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야간 수업도 있네. 아니 잠깐, 평일 저녁이랑 주말에 수업 들으면 직장 생활이랑 병행 가능하잖아?!'


그러고 보니 영상편집도 직장을 다닐 때 야간에 배웠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강좌 리스트에서 평일 야간 수업과 주말 수업 중에 관심 가는 수업을 골라냈다. 그렇게 주말에는 취업용으로 숲해설가 양성과정을, 주중 야간에는 경영컨설턴트의 자질 중 하나로 생각하는 전문적인 말투를 위해 스피치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구직에 방해가 되지 않게 되었으니 일단 돈부터 벌어야겠다. 생계비와 경력 공백을 덜기 위해 바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구직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 구직급여도 신청했다.


구직급여 신청은 이번에 두 번째이다. 여태 구직급여 수급 가능 여부를 몰랐거나 항상 빠른 취업이 가능해 보여서 신청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일자리라는 게 내가 일할 의지만 있다고 해서 당장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특히 여기 부산에서 뼈저리게 배웠다. 마침 확실하게 구직급여 수급 대상이기도 하다. 보험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는 인재가 참 많다. 덕분에 나라에서 해주는 무료 수업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한 스펙의 강사님들이 진행하시는 양질의 강의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나는 '배움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따로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처럼 양질의 수업은 성장에 목마른 나에게 성장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을 인도해 줬다. 하지만 결국 물은 말이 직접 먹어야 하는 법.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성장에 목이 마르다고 말만 하면서 정작 물가에서 물을 먹지 않는 게으르고 욕심 많은 말이었다.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문적인 분위기로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스피치 수업은 이론만 안다고 되는 수업이 아니다. 배운 것을 제대로 흡수하려면 수업 시간에 학습한 것을 꾸준히 연습해서 체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총 4회차의 수업 중 2회차 때에 전문적으로 말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는 나의 말투가 부자연스러워 부끄러웠다. 완전히 체화가 되기 전까지의 어색한 기간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업이 거의 끝나가는 3회차나 되어서야 이상한 점을 직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많이 나아졌는데 나는 왜 아직 그대로지?'


이론만 배우고 끝낼 것이 아니라 연습의 중요성이 그때 와닿았다. 그러고 보니 컨설팅 회사에서 만난 동기의 아나운서 발음의 비결은 피나는 노력이라는 것도 기억났다. 발음을 체화하기 위해 교육비는 물론이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1년을 연습했다지.


알면 뭐 하나. 게으른 천성은 어디 가지 않는지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천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강사님의 좋은 강의는 나에게 죽은 지식이 되었다. 뭐, 전문적인 애티튜트로 하는 경영 컨설팅이 나와 맞지 않다는 정도는 알았으니까 아주 소득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잘 하는 거 찾으면 그거 하면 되지 뭐!'

작가의 이전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