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흡수삭제예정) 고맙습니다 (1/4)
동시에 2가지의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있는 9월.
각각의 아카데미는 또 각각 2개의 커리큘럼으로 나누어져 있다. 기초 4회와 심화 4회로 이루어진 예비인력 아카데미와 탐구 5회와 기획 5회로 이루어진 전문가 아카데미로. 그렇게 18개의 강의가 약 2달이라는 시간 안에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나의 아카데미 수강 목표는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로 문화예술강사 시장 진입 방법, 두 번째는 기획서 작성 방법, 마지막으로 기획서 발표 상금이다.
그리고 수업을 듣자마자 세 가지의 목적 중에 '문화예술교육 강사 시장으로의 진입 방법'이라는 첫 번째 목적이 폐기됐다.
수업 내용이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전문가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예비인력 아카데미조차 이미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수업이었다.
'쓸모 있고 싶어서 배우려고 온 건데 결국 배우는 것조차도 기본적인 스펙이 필요하구나….'
또다시 혼자 뒤처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기획서 작성 방법과 발표 상금이라는 두 가지 목적이 남아있으니까. 그래, 기획서 작성법이라도 배워두면 뭐라도 제안서 낼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금이라도 탄다면 한 달, 더 살 수 있다.
예비인력 아카데미 전체 8일의 교육 중 3번째 교육이자 심화 교육 수업의 첫 번째 날인 9월 8일 금요일 저녁.
수업이 끝나자 갑자기 기획 발표를 위한 팀을 결성하란다. 30분 후에 강의실을 폐쇄해야 하기 때문에 제한 시간은 30분이다.
당황스러웠다. 첫 수업 날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한 번씩 한 것이 전부다. 그 뒤로는 딱히 교류할 시간도 없었는데 갑자기 팀을 결성하라니.
당황하고 있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팀을 이루었다. 결성된 팀들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처음부터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개인은 기획 발표 심사 대상에서 제외기 때문에 나도 한 명이라도 잡아 팀을 짜야 하는데 쉽지 않다. 직접 팀을 꾸리자니 누가 심사 대상에도 해당되면서 팀을 원하지만 아직 팀을 정하지 못한 상태인지 알 길이 없다. 심사 대상이 되려면 팀원들의 학습 수료 여부가 중요한데 전체 수업이 절반도 지나지 않아 예측할 수도, 확인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존 팀에 합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기존 팀에 합류시켜달라고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태 예술 관련 경험도 전무하고 기획 관련해서도 내가 도움이 될 거라는 자신이 없다.
"시간 다 됐습니다. 모두 나가세요."
어영부영하는 사이 제한 시간이 끝났다. 팀이 결성된 사람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결국 혼자가 된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재촉해 어두운 대로변을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다.
'기획서 발표 상금'이라는 목적도 폐기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걸어 내가 탈 버스정류소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또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자 생각을 환기시키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기획서 작성 방법이라도 배우고 전체적으로 다 해보는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지 뭐.'
9월 22일 금요일, 대망의 기획서 작성 실습 교육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이번에도 나의 예상과는 달리 사례 강의가 이어졌다. 앞서 대부분의 수업들이 나의 기대와는 다른 수업일 때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미련 곰팅이인 나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수업에 임했고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괜히 신청했어….'
그렇게 세 가지 목적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강사 시장 진입 방법도, 상금도, 기획서 작성 방법도. 무엇 하나 얻지 못했다. 잘못된 판단으로 괜한 시간과 체력과 돈만 날린 것 같다. 그간 들인 노력에 속이 쓰리다.
강의가 끝나고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기획서 발표 심사 대상에 개인 참가자도 포함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팀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았던 모양이다.
'나이스!!'
모두 죽은 줄 알았던 세 가지 목적 중에 한 가지 목적이 살아났다. 그래, 상금이라도 타보자.
예비반 기획서 발표 수상 대상은 딱 1팀. 2팀이나 주는 전문가반보다는 그래도 예비인력들을 위한 예비반이 수상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여기서 1등을 노려보자.
기획서 발표일은 약 3주 후인 토요일지만 기획서는 약 2주일 후인 월요일까지 제출하라고 한다. 짧고 굵게 완성하는 프로젝트라면 해볼 만하다.
'딱 2주일만 고생하면 돼!!'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기획서 발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혼자 하는 사람의 예산은 최대 100만 원. 그리고 1등을 하면, 기획서 예산에 쓴 금액을 실제로 지원받아 프로그램을 진행해 볼 수 있다.
받은 기획서 양식을 훑어봤다. 기획서와 회차별 교육 내용 그리고 예산 편성표까지 총 3가지 양식이 있다. 훑어보니 기획서에 전체적인 내용을 적고 회차별 교육 내용과 예산 편성표는 기획서에 간단히 적은 것을 상세하게 다시 기술하면 될 것 같다.
기획서 양식부터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명, 추진 기간, 추진 장소, 추진 배경, 추진 목적 및 기획의도, 주요 내용, 추진체계 및 방안, 중심 키워드, 장르별 분류, 주요 특징, 기대효과, 참여 인력, 성과 유형, 예산.
하나하나 뜯어보니 대부분의 칸에서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정말 하나도 알 수 없다. '추진 배경'이랑 '추진 목적 및 기획의도'는 뭘 쓰라는 거지? '장르별 분류'는 또 무슨 말이지? '주요 특징'이랑 '기대효과'도 같은 말 아니야?
양식을 한참 노려봤지만 도대체 무엇을 넣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들은 일단 미뤄두고 아는 부분들 중에 쉬워 보이는 부분들을 먼저 채워봐야겠다.
모르겠는 부분들에는 V 표시를 하고 V 표시가 없는 부분들을 훑어보니 그나마 '추진 기간' 및 '장소'가 비교적 빨리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거부터 시작해 보자. 하지만 막상 이 부분을 채우려니 이것도 쉽지 않다.
'추진 기간' 및 '추진 장소'는 나 하나 선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 공간을 대관했다가 취소하면 수수료는? 온갖 걱정에 휩싸인 나는 다음날 운영진에게 문의전화를 했다.
"기획서 작성 관련으로 문의사항 있어 전화드렸는데요. 혹시 기획서 양식 중에 시간이랑 장소를 임의로 작성해도 되나요? 아니면 실제로 공간 대관 예약을 해야 하나요?"
나의 질문에 운영진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당연히 공간 대관 예약을 해놓고 작성하셔야죠."
추진 기간 및 장소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일단은 이것도 보류. 교육 커리큘럼인 '주요 내용'부터 채워야겠다.
'주제의식은 무엇으로, 매개는 뭘로 해보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는 게 없다. 할 줄 아는 예술도 없고 내세울 예술 경력도 없다. 아무리 고민해도 콘텐츠가 없다. 나의 근심과는 별개로 시간은 열심히 흘러갔다.
벌써 5일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는데 기획서는 여전히 거의 비어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팀 단위로 준비하는 사람들에 비해 기획에 대한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할 텐데 콘텐츠도 없다. 잠을 다 자면서 기획을 하기에는 팀 단위로 기획을 하는 사람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
그렇게 잠을 자지 않고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도 밤낮없이 3일 정도 기획서를 붙들고 기획서 양식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아이디어를 짜내어 주제의식과 매개는 최근 내가 겪고 배운 것들을 엮어 '꿈 찾기'와 '캘리그래피'를 접목하기로 했다. 그렇게 꿈 수첩 및 힐링 캘리그래피로 기획을 시작했다.
주제와 매개를 잡고 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추진 배경부터 추진 목적 및 기획의도 등등 텍스트로 가능한 부분들이 술술술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콘텐츠가 나오고 나니 이제 예산을 작성할 차례다. 예산을 짜다 보니 회계 인력으로써 증빙은 기본이다. 증빙자료들을 수집하다 보니 완성 작품 예시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완성 작품 예시 사진도 첨부했다.
또 예산의 인건비 부분을 작성하다 보니 강사 이력 사항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예산 증빙은 물론이고 완성 작품 예시와 강사 이력 사항까지 추가되었다.
기획서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프로그램명과 추진 기간 및 장소뿐이다.
'대관은 어쩌지….'
작업실이 있거나 직접 대관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없을 텐데.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나라에서 무료로 대관해 주는 시설들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근무했던 곳 중에 무료 대관 시설이 있었고 지금 이 수업도 무료대관시설에서 수업하는 거잖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가 사는 구의 무료대관시설을 검색해 사정을 설명하고 대관 예약을 했다. 마지막으로 전체 내용을 종합해서 프로그램명을 정했다.
'나의 꿈, 빛낼 시간
-꿈 수첩 및 힐링 캘리그래피 아크릴 무드등 제작-'
그렇게 얼기설기 양식이라도 다 채운 기획서가 만들어졌다.
모두 마치고 보니 기획서 제출 마감까지 이틀이나 남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완성도를 높이면 더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발표용 PPT도 준비하면 좋겠다.
'후회가 남지 않으려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발표용 PPT 제작을 위해 이틀 밤을 추가로 더샜다. 그리고 10월 9일 월요일 새벽 5시 반, 내 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기획서와 발표용 PPT 자료를 제출한 후 기절하듯이 곯아떨어졌다.
10월 10일 화요일, 전문가 아카데미의 2번째 커리큘럼인 기획 과정의 두 번째 수업이자 기획 해커톤 발표를 위한 팀을 결성하는 날이다.
수업이 끝나고 이번에도 팀을 형성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알아서' 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초안은 있는 팀 형성이다. 스크린 화면에는 운영진들이 임의로 배정한 조별 리스트가 띄워져 있다. 이번 수업이 있기 전, 사전조사를 통해 미리 팀을 결성해 준 것이다.
'이번에는 예비반 때처럼 혼자 고생할 일도 없고, 예술 분야의 전문성도 팀원을 통해 채울 수 있을 거야.'
부푼 기대를 안고 스크린에 있는 우리 팀의 이름들을 찾아 모여 앉았다. 팀원이 모두 모이자 통성명과 간단한 자기소개 그리고 팀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의 헛된 기대는 '펑!' 터져버렸다.
우선 우리 팀에는 예술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전문가반인데 예술도 기획도 교육도 경력자가 아무도 없다니.
두 번째 문제는 기획서 작성에 진심인 사람도 나 하나뿐이다. 다들 본업이 바빠서 또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배우러 왔다고 한다.
그래도 혼자는 외롭다. 최대한 팀으로 활동하고 싶다. 혹시나 싶어 알아보니 이수 조건을 채울 수 있는 사람도 나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미 수료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들뿐이다. 이대로 팀이 결성되어버리면, 우리 팀은 심사에서 제외다.
우리 팀의 리더는 심사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팀을 이뤄 기획서를 작성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상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소한 심사 티켓이라도 얻어야 하고, 승률을 올리기 위해 같이 열심히 해줄 팀원이 필요하다.
'이 팀을 나와도 될까? 역시 남아있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팀에서 빠져나오자니 너무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남아있기에는 그동안 수료 기준을 채우기 위해 들인 시간이 아깝다. 어차피 심사 대상에서 제외될 거라면 나도 열심히 할 유인이 없다. 한참의 고민 끝에 팀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정했다.
그 후 나도 팀을 이루기 위한 몇 번의 헤쳐 모여가 더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참가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은 이미 최대 인원이 모두 찬 상태였고, 남은 개인들에게 접근해 보니 원팀과 마찬가지로 수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이름만 올려두고 묻어가려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혼자가 되었다.
전문가 아카데미의 '기획서 해커톤'을 제외한 마지막 수업 날인 10월 12일 목요일.
적혀있는 커리큘럼 대신 기획서 작성 관련 수업이 진행되었다. 기획서 양식도 예비반 때에 받았던 것에 파란 글씨로 예시까지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예비반 때에는 교육 프로그램 기획안만 제출이 가능했지만 전문가반에서는 연구 기획안도 발표가 가능하다.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연구기획이 진행도 쉽고 성과 제출도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나도 교육 프로그램 기획은 해봤기도 하고 몇 없는 아이디어를 다 짜냈기에 이번에는 연구 기획안을 작성해 봐야겠다. 일단 예비반 기획 발표부터 마치고.
10월 14일, 대망의 예비반 기획 발표날이다.
기획서 작성과 발표 자료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이제 발표만 잘 하면 된다. 긴장을 풀기 위해 1시간이나 일찍 교실에 도착했다. 발표는 2시부터 시작이고 괜히 밥을 먹고 왔다가는 얹힐까 봐 점심도 굶다시피 하고 교실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간 순간, 발표자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심사 대형에 몸이 굳었다.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직접 보니 공포에 몸이 움츠러든다.
'괜찮아. 괜찮아. 당연한 거야. 평가를 받아야 등수도 매기지. 상 타려고 왔잖아. 일단 자리에 앉자.'
굳은 몸을 달래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한 후 스크린에 띄워진 발표 순서를 본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바들바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발표 순서는 무슨 기준으로 정한 거지?'
나의 발표 순서가 첫 번째였던 것이다. 일단 ㄱㄴㄷ순은 아니다. 내 이름은 꽤나 뒤 순번이다. 개인과 팀 순서도 아니다. 발표 순서만 봤을 때에는 특별한 규칙이 보이지 않는다.
'아, 기획서를 잘 만들지 못해서 이미 떨어진 거구나!'
그렇게도 잠이 많은 내가 무려 5일 밤을 꼬박 새워서 만든 작업물인데 이미 탈락이라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 안돼…!!'
교실을 뛰쳐나왔다. 고장 난 정수기처럼 줄줄 새는 눈물이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른다. 망가진 정수기를 고칠 수는 없으니 사람들이 없을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 오랜 외톨이 경력으로 직감적으로 사람들이 오지 않을 계단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만든 건데…. 어떻게 만든 건데….'
계단에 주저앉자 고장 난 정수기가 폭포수가 되어 콸콸 넘치기 시작했다.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느낌과 생계에 대한 절박함이 무너져내려 뒤엉켰다.
'으, 끅끅, 끅.'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최대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울었다. 모두의 앞에 나의 바보 같은 기획서를 발표할 생각과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질문. 그리고 다른 수강생들의 웃음거리가 될 공포에 압도되어 몸이 굳는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편하게 엉엉 울고 싶다.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그간 노력한 시간들이 아깝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을 울고 있는데 운영진에게 전화가 왔다.
"우정씨 어디 계세요? 발표 5분 전이에요. 빨리 자리로 돌아오세요."
또 시간이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떨어진 거 이 부끄러운 자료를 내가 만들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다.
'발표 못하겠어. 아니 안 할래. 집으로 갈래.'
일단 눈물을 훔치고 자리로 가 집으로 갈 요량으로 짐을 쌌다. 운영진에게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당황한 운영진이 나를 붙잡았다.
"왜, 왜 발표 안 하시려고 해요?"
"흐끅. 제가 잘 못해서 제일 앞에 발표시키는 거잖아요."
나의 발표 불참 사유를 들은 운영진이 말했다. 그냥 제출 순서일 뿐이라고. 내가 제일 빨리 냈을 뿐이라고.
"아니 준비 잘 해왔는데 발표 왜 안 해요? 안 아까워요?"
그 말을 듣자 그동안 고생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며 다시 한번 울컥했다. 그래, 노력한 시간을 위해서라도 용기 내보자.
"발표, 해볼게요."
발표 준비를 위해 급하게 화장실로 가 눈알부터 씻고 돌아왔다.
울고 들어간 티는 났겠지만 발표는 무사히 마쳤다. 발표가 끝나자 심사위원들의 질의응답이 있었다. 그런데 질문의 강도가 내게만 유독 날카롭다. 내게는 '어디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해 왔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표에서 다 못 보여준 부분을 보충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질문들을 했다.
'역시 잘 못해서 이미 떨어진 거 맞잖아….'
진행요원이 역시 거짓말을 했다는 일종의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덕에 남들 앞에 서볼 수 있는 기회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남들 앞에서 최소한 울지 않고 말이라도 했다. 진행요원 덕분에 한 뼘 성장한 것이었다.
모든 팀의 발표가 끝난 후 심사위원들이 최종 평가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문화재단의 팀장님께서 간단한 자기소개 후 기획서를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시겠다고 했다.
"기획서 작성 및 발표는 설득의 과정입니다.
기획서를 잘 쓰는 방법을 알려드리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말씀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이 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팀장님께서 한 번 뜸을 들이시고는 말씀을 이으셨다.
"가장 처음 발표하신 분이 작성하신 기획서가 페이퍼 상으로는 만 점짜리 기획서입니다.
아마 텍스트를 다루는 직업을 가지신 분 같습니다."
'기획서라는 것 자체를 처음 써보는데 내 기획서가 기존에 텍스트를 다루는 사람이 쓴 기획서 같다니?
게다가 설득은커녕 말도 못 하는 내가?'
어벙벙해 있는 사이 팀장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셨다. 그러고는 내가 기획서 양식을 분석한 것과 기획서를 작성할 때에 고려했던 부분들을 모두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페이퍼 작성을 할 때에는 내가 쓴 기획서를 참고해서 쓰면 된다고까지 말씀해 주셨다.
그다음으로 발표 준비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발표 준비는 매번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시간과 노력으로 준비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기획서 작성 방법을 발표까지 끝난 후에야 들을 수 있게 되다니.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답을 들을 수 있어 기쁘다. 게다가 내가 고민하고 내린 방법이 완벽하다는 말씀까지. 팀장님의 말씀을 필기하면서 행복 회로를 돌렸다.
'혹시 나 1등인 건가?
그럼 이 지원금으로 예술강사로 첫 발을 내딛는 건가!!
처음에는 상금을 받으면 생활비로 충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획서를 준비하며 그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준비하다 보니 정말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과 희망을 전하면서 생계도 이어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팀장님의 말씀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평가 결과가 나왔다.
"원래는 한 팀만 드린다고 했습니다만, 총 세 팀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1등 두 팀과 2등 한 팀입니다. 2등 팀의 경우에는 상금의 절반을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세어보니 총 12팀이 발표했다. 12팀 중에 3등 안에만 들면 된다. 상위 25% 이내에 들면 된다는 소리다. 아주 못하는 영역이 아니고는 대충 해도 상위 25% 안에는 대부분 들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순위권 안에는 들었겠지. 기대를 하며 내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기다렸다.
"우선 2위를 수상한 OOO 팀!! 축하드립니다!!"
2위를 수상한 팀이 호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 팀에 내 이름은 없다.
'설마 내 절박함에 1위…인 건가….'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내 이름을 기다렸다.
"1위를 수상한 팀은 OOO 팀과 OOO 팀!! 축하드립니다!!"
"?????"
기대와는 달리 내 이름은 끝끝내 불리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유력한 수상 후보였던 팀도 상을 받지는 못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이 우루루 내게로 와 위로해 줬다.
"나는 우정씨가 1등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저는 OOO 님이 수상하실 줄 알았는데 호명되지 않으셔서 꽤 놀랬네요."
"우리 눈이랑 심사위원분들께서 보시는 시선이랑 뭔가 다른가 보네요."
교실에서 심심한 위로를 주고받고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가까운 버스정류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배웅한 뒤에야 억지 미소를 풀 수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의 버스정류소까지 먼 길을 걸어갔다. 아까 하도 많이 울어서 그런지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지…. 전문가반은 자신 없는데….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죽으라는 말인가….'
예비인력 발표는 끝났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약 9일 후인 10월 23일 월요일까지 전문가 해커톤 발표를 위한 기획서 초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 털린 멘탈과 콘텐츠로 인해 준비하고 싶지 않다. 아니, 더 이상 할 기력도 콘텐츠도 없다.
'예비반 때에도 안 됐는데 전문가반에서 퍽이나 되겠다. 안 되는 거 알았으니까 이번에는 진짜 그냥 하지 말까?'
생각은 하지만 역시 수료 기준을 맞추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깝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남은 기회라도 잡아봐야지.'
아직 컨디션도 돌아오지 못했고 멘탈도 다 터진 상태지만 열심히 만든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제일 먼저 해커톤이라는 용어의 정의부터 찾아봤다. 해커톤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즉석에서 무언가를 해내는 일인 듯싶다.
'일단 초안만 내고 당일에 완성해도 된다는 말인가 보네?'
다행이다. 일단 뼈대만 대충 적어서 제출하고 수면을 좀 보충한 후에 살은 당일에 붙이자. 그렇게 연이어 두 번째 기획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콘텐츠가 더 없다. 고민할 시간도 더 없다. 콘텐츠는 정말 없지만 참가는 하고 싶다.
결국 정말 꺼내고 싶지 않았던 '자살'을 주제로, 숲해설가 양성과정을 접목해 '숲'을 매개로 뼈대를 작성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마감기한에 맞춰 기획서 초안을 제출했다.
기획서를 제출한 다음날, 운영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리 해커톤이라지만 당일에 완성하기는 힘들 거예요. 이틀 후인 목요일까지 80%는 해오세요."
'어쨌든 당일까지 완성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아?'
아직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 잠시라도 더 쉬고 싶다. 기획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주제랑 매개인데 그 부분도 정해졌다. 나머지는 당일에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10월 28일, 해커톤 당일. 앉은 자리에서 기획서를 전부 작성하고 최종 제출을 했다.
제출이 끝나자마자 바로 발표가 이어졌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하자니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직 죽고 싶은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과거에 약을 먹었고 자살 기도를 했었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지? 이번에는 도망가기도 싫은데?'
내 차례가 오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발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서를 작성하는 데에 투입된 시간은 예비인력 기획 발표를 준비하는 데에 들어간 시간보다 훨씬 적다. 하지만 이번 기획은 내가 그간 살아내기 위해 애쓴 시간들을 배경으로 한다. 나와 나의 수업을 들어줄 많은 사람들의 내일을 목적으로 한다. 목적,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용기 내야 한다. 그렇게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나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과거의 자살시도와 투약 경험을 담담히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눈물이 날 것 같다.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상금을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기도 하다. 그 많은 울먹임을 참고 간신히 제한 시간에 맞춰 발표를 끝냈다.
이번 질의응답에서는 날카로운 질문 대신 지금의 기획에 대한 보완 관련 피드백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은 한 마디.
"이번에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하더라도 이 기획 실행에 옮겨보시면 좋겠어요."
직감했다. 이번에도 떨어졌다는 사실을.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이번에는 예정대로인 딱 두 팀만이 지원 대상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두 팀에도 들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이번 경험도 그러했다.
"이번에는 안 울었네요."
내 어깨가 축 처져있었나 보다. 편안한 분위기와 열정을 동시에 지닌 한 수강생분께서 어깨를 툭 치며 미소 지어주셨다.
"아…. 하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절차가 끝난 후 망연자실한 내게 문화재단 팀장님께서 제주도에 사는 어느 작가님을 언급해 주시며 응원해 주셨다. 이 기획, 계속해 보라고.
'그래요. 레퍼런스가 쌓이면 언젠가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당장의 생계가 급해요.'
생각은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징징댄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대신 한 가지 배운 점이 있긴 하다. 뜬금없지만 TPO에 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비인력 기획서 발표회 때에는 다들 잘 차려입고 왔는데 나만 편하게 입고 갔었다. 예비인력 때에 다들 잘 차려입고 온 모습을 보고 전문가 기획서 발표회에 때에는 나도 열심히 차려 입고 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차려입고 온 사람이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편한 복장으로 왔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레퍼런스가 부족하다고 판단되었을 예비인력 때에는 옷차림에서라도 전문성을 보여야 했고, 이미 전문가로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옷차림에서 전문성보다는 개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아주 얻어 가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그거면 되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덕에 하나라도 건져갈 수 있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