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원으로 시작하는 버킷리스트

by 무우지렁이

이 정도까지 왔으면 눈물이 날 것도 같은데. 눈물도 나질 않는다.


돌이켜보니 엄마, 아빠도 나를 낳고 꽤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딸이라는 살가운 맛도 없이 무뚝뚝하고 천방지축에 맨날 사고나 치고 다니는 선머슴 같은 아이. 엄마들이라면 응당 가졌을 예쁜 딸 꾸미기에 필요한, 목티와 스타킹 등 몸에 달라붙는 옷은 질색하는 까다로운 아이. 방실방실 웃는 딸이 아닌 낯도 엄청나 가리고 친구도 없는 우울한 아이.


그 아이는 공부도 안 하고 숙제도 안 해가더니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커리어도 망하고 연애, 결혼, 출산 전부 포기한 못난 어른이 되어버렸다.


본가의 통유리 벽에 붙은 침대에 누워 매일 밤 생각했었다. 이대로 도르르 굴러떨어져 죽고 싶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잠시나마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몇 번이나 창문을 열고 창틀에 다리를 걸었다가 내려왔다. 시한부인 아빠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었기에 버텨야 했다, 그때는.


그리고 지금은, 이제 더는 버텨낼 필요가 없다. 생계도 친구도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삶의 목표였던, '아빠의 임종 때에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있을 것.' 미션도 클리어했다. 이제 더 이상은 굳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나 같은 쓰레기가 괜히 한자리 차지해서 직장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연명해야 할 이유도 이제는 없다. 집에 가면 내 방으로 달려가자. 침대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고 바로 뛰어내리자. 그걸로 끝이다.


어디까지 왔을까. 잠시 눈을 떴다. 버스는 드디어 내가 아는 동네로 진입했다.




자살에 실패할 때마다 생각했다. 어떻게든 자살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집 안에서 죽자니 집주인한테 피해가 가고. 집 밖에 죽자니 행인들에게 피해가 가고 역시 그 땅 주인에게도 피해가 간다. 이도 저도 못 하겠기 차에 치여 죽자니 차 주인에게 생길 트라우마는 어쩔 건가.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하나하나 다 신경 써주지는 못하겠다. 당장 내가 너무 힘들어서 죽어야겠다. 삶에 미련도 없고 세상에 내가 필요하기는커녕 피해만 끼치고 있다. 그래, 너무 오래 버텼다.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 나도 더 이상 살 필요도, 이유도, 가치도 없다.


아니, 내가 지금 당장 죽는 것이 가장 피해를 덜 주는 일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을 포함해 앞으로 줄 피해보다 지금 당장 여기 아파트 주민들에게 주는 피해가 적을 것 같다. 같이 사는 엄마랑 남동생? 엄마도 남동생도 별생각 없어 보인다.


나의 죽음에 슬퍼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죽음의 버스는 빠르게 내달려 벌써 우리 동네로 진입했다. 2분 내로 버스에서 내릴 예정이고 5분이면 멀미 나는 몸과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갈 수 있다. 내 방 창문을 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 정말 안녕이다.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와서 마음이 먹먹하다. 하지만 다리는 습관적으로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이렇게 플랑크톤, 박테리아보다 못한 삶만 살다가 끝까지 피해만 끼치고 가는 건가.


정리해 보자. 여태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악착같이 모았다. 컵라면과 결식이 주식이었고 이제는 그렇게도 싫어했던 김치조차 내게는 사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게 남은 게 뭐지? 아무것도 없다.


장례 비용이 2천만 원은 든다던데. 최소한 장례 비용은 모으고 죽어야겠다던 다짐도 사회에 내던져진 후 10년 동안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금액이라 어느샌가 포기한 지 오래다. 장례 비용조차 포기한 인생.


돈, 돈, 돈, 돈.

그래, 내 인생은 오로지 '돈'이었다.


그렇게 평생 돈타령을 했는데 그러면 지금 남은 돈은 얼마지? 문득 궁금해졌다. 은행 어플을 켜 잔액 확인했다. 200만 원. 내 계좌에 찍힌 돈은 고작 200만 원이 전부였다.


통장 잔액을 보니 어이가 없다. 10여 년을 노력했는데 200만 원이 전부라니. 먹고살기 급급해서 일만 하고 살았는데도 이게 전부라니. 이 돈이면 장례 비용의 10%밖에 되질 않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재산.




갑자기 이대로 죽기에는 화가 났다. 못 해본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자니 억울할 것 같다. 이 정도 돈이면 큰돈도 아니니까 금방 다 쓸 것 같다.


'좋아. 이거 다 쓸 때까지만 살고 통장 잔액이 0원이 되면, 그때 죽자.'


그렇게 전 재산 200만 원, 월급 200만 원 인생의 목숨 잔액 카운팅이 시작되었다. 현관문 앞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집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여느 때와 다르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한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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