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의 안 좋은 예

by 무우지렁이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일은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은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내가 잘하고 좋아할 만한 일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봐도 할 줄 아는 일도, 좋아하는 일도 '연구' 딱 하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해본 것이 독학뿐이니 연구가 좋다고 생각했고 그나마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문과 중에 연구를 업으로 하는 직업은? '교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 돈이 발목을 잡았다. 당장의 돈벌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교수가 되려면 대학원부터 가야 한다. 대학원을 가려면 또 돈이 필요하겠지.


돈, 돈, 돈, 돈, 돈.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림도, 이과 공부도, 대학원까지 모두 돈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이제 와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가난한 상경 계열 졸업생으로서 차선을 찾아야 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학문을 위한 연구보다는 실생활에 직결되는 연구를 하고 싶은 것 같다. 나의 문제해결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좋다. 문득 친하게 지내던 교수님의 본업이 생각났다.


'경영 컨설턴트'.




경영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을 일들을 찾아봤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시험공부뿐이다. 관련으로 '경영지도사'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람이 말했다. 그 자격증은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이미 지도사에 꽂힌 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길이 아닌 것들을 시작할 때는 다들 부정적인 말만 한다'고 생각했고 '결과로 보여주면 말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상경해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그간 아르바이트로 모아놓았던 돈으로 전업 수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편의점 도시락 하나로 하루 2끼를 먹으며 도서관 열람실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악착같이 공부했고 마침내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실무 수습도 바로 받고 등록증도 발급받았다.


경영지도사에 합격하자 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역시. 성과로 보여주니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하지만 그 태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성과가 없으니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사람들의 인식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역시 쓸모없는 자격증'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내게 말했다.


속은 상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보여줄 성과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7년이 흘렀다. 8년 차 경영지도사.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단 한 번도 전문가로서 페이를 받고 경영 컨설팅을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나는 지도사가 취업에 정말 쓸모없는 자격증이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한 사람이 되었다.




자격증을 취득한 후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경영지도 업무가 아닌,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다양한 단기 아르바이트부터 그렇게도 원치 않았던 회계 관련 업무까지, 합격만 시켜주면 근무지에 맞춰 전국으로 이사를 다녔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생계는 굶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였다.


항상 신입이지만 경력직 자리를 뚫고 입사한다. 몸과 마음을 다 갈아 넣어 일한다. 그리고 과로사로 죽을 것 같고 매일 퇴근길에 '차에 치여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아차, 도망치듯 퇴사하기를 반복했다. 그게 근무 기준 2~6달. 그렇게 퇴사하고 나면 바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모아둔 돈으로 1~2달을 쉰다. 병원에 갈 수는 없다. 병원비가 부담스럽다.


돈이 없다. 한 달 치 생활비가 남았을 때, 또 닥치는 대로 일을 구한다. 당장 써주기만 하면 오케이. 나는 그렇게 계약직과 퇴사와 몸 져 누워있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나는 항상 당장의 생계가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빚은 없다는 정도일까.




정규직의 문을 두드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운이 많이 나빠 구직 준비하는 사이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정규직에 취직했더라도 11개월이면 어김없이 잘려서 그렇지.


정규직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원가 분석사 시험공부를 하며 공장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날,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공장을 다니는 점에 기존의 직원들에게 약간은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멘사 회원인 점을 어필했다.


경리 언니는 그날 저녁에 따님과 식사하며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의 통찰과 위트를 자랑하기 위해 다음날 현장으로 내려와 우리에게 따님의 말씀을 전했다.


"우리 딸이 무지렁 씨 얘기 듣고 그러더라고. '멘사 회원이 왜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 멘사 회원 아니고 멘스(생리) 회원 아니야?'라고. 푸하하하하하하."


경리 언니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기분이 너무 나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그 대단하다는 멘사 회원씩이나 돼서도 여기서 이러고 있네.'




경영 컨설팅과 관련해서 문을 두드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단순 아르바이트나 사무보조, 경리 등의 일을 하고 있으면 역시 어렵게 취득한 경영지도사가 밟혔다. 다문 한두 달이라도 여유가 있는 구직일 때에는 어김없이 경영 컨설팅 관련 직장으로 구직했고 딱 한 번, 컨설팅회사에 취직이 된 적도 있었다.


'드디어 나도 날개를 펼칠 때가 온 것인가!!'


정말이지 이번에는 드디어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줄 알았다. 하지만 날아오르기는 개뿔. 한 달 만에 잘렸다. 날아오를 날개도 없으면서 날아오를 것이 생각했으니 그 결과는 당연한 추락이었다.


잘린 지 이틀째 되던 날에는 급하게 구한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려다 부동산 사기를 당해 그간 굶어가며 모아둔 돈은 물론이고 당장의 생활비까지 싹싹 긁어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렸다. 수중에 단돈 500원도 없는 상황. 도보로 배달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하루살이가 되었다.


정신력과 체력이 다해 정말이지 이제는 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하루살이가 아니라 한달살이라도 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합격한 곳은 돌고 돌아 다시 창업 지원 업무.


수습 기간 2달 포함 총 1년 계약직. 전반적인 행정은 물론이고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화장실 배관을 포함한 건물 유지보수까지 거의 모든 업무를 '혼자' 해야 한다. 회계 처리를 위해 일주일 중 절반은 출장도 다녀야 한다. 업무나 처우 등등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좋다.


여기서 계약기간을 채우고 나면 다음 구직의 발판이 되어줄 테니까.




입사 한 달 차, 오랜만에 집에서 온 연락은 아빠의 시한부 판정 소식. 채 1년도 남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의 커리어와 아빠의 임종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 정도의 바닥 인생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가능은 하지만, 아빠와의 시간은 정말이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수습 기간만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와 다시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경리는 물론이고 공장 생산직과 캐셔, 판촉 등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지원했다. 하지만 6개월이 넘도록 한 군데서도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구한 일자리는 집 근처 전봇대에 잔뜩 붙어있는 채용 공고를 보고 구한 공장 사무/현장 업무 보조. 일자리를 구해서 기쁜 마음 반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착잡한 마음 반으로, 공장으로 출퇴근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우물쭈물하면서 이때까지 몰랐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내가 싫어졌다. 열심히 일을 해도 항상 혼나는 내가 싫었다. 옷 한 벌 사 입을 줄 몰라서 가족들이 사주는, 내 취향이 아닌 옷들을 입는 내가 싫어졌다. 일과 집이 삶의 전부인데 그 어디에서도 나는 쓸모가 없다.


그나마 우리 셋 중에 공부도 가장 잘했던 나인데, 그나마 가장 기대가 높았던 나였을 텐데. 아빠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내 모습이 공장 보조라니. 최대한 아빠가 걱정 덜 하고 눈 감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래도 아빠의 마지막 기억에 최대한 잘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공장을 퇴사한 후, 다시 창업 지원 업계에 도전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경영 컨설팅 사례를 요구받았고 어떤 대답을 하건,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채용 시즌의 마지막 채용 공고에서 운 좋게 합격한 곳이 지금의 직장이다.


아빠는 1년이셨던 시한부 기한을 넘어 무려 6개월을 더 살고 최근 돌아가셨다. 물론 지금의 내 상태는 이 꼬락서니만 그래도 괜찮다. 아빠가 기억하는 (관심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내 마지막 모습은 그래도 나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일 테니까.

이전 03화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몰랐다